'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45건

  1. 2022.12.18 점.,쉼
  2. 2022.12.18 素心(소심)
  3. 2022.08.21 꽃길
  4. 2022.06.07 參辦托鉢삼판탁발
  5. 2022.06.03
  6. 2022.05.31
  7. 2022.05.28 觀燈
  8. 2022.05.25 페르소나Persona & Impostor임포스터
  9. 2022.01.31 공양주
  10. 2022.01.31 옛일

점.,쉼

카테고리 없음 2022. 12. 18. 13:38

점.,쉼

秤動點
Libration points

Lagrangian points

나를 두고 싶은 자리.
내가 있고 싶은 자리,

"두께 없이 투명한 양면"이 맞닿은 사이
"가 없는 나선의 궤적"으로 지향한 흔적

垂直의 抗力이 없는 곳,
遠心力과 求心力의 慣性이 同時에 멈추는 점.

Où il n'y a pas de Gravité?
Where is there no Gravity?

그나저나
길 잃은 나그네는 어디로 갔을까?
님 찾는 하얀나비는 어디로 갈까?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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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心(소심)

카테고리 없음 2022. 12. 18. 09:19

素心(소심)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俗에서
파아란 하늘보며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俗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

바탕[素心]을 본 아침이다.

고스란히 드러났고
여실하게 나타났다

흔적이야 잠깐 덮여있지만
흔적은 지워지지는 않는다

"흔적이 지향이었다"
는 말을 말 앞에 던졌기 때문이다
흔적이 바탕을 덮었다
결국 흔적이 바탕이었다.

나를 덮고 있는 것[蘊(온)]들
내가 끌어서 덮어 쓰고 있는 것[業(업)]들
드러난 흔적 잘 쓰는 일은
덮여 있는 바탕을 꺼내 쓰는 일이다.

#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나는 나의 기도로/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보다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라는
시인이 위로하는 따뜻한 슬픔의 기도를 끌어와 덮는다

"내 팔 내 흔들어 네 팔 내 흔드는 일"
素心이 할 일이다.

//

祝詩(축시) / 류근


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지길 바랍니다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밝혀 사랑한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나간 날들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자기 연민의 도구로 쓰여지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아니길 바랍니다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빈자리를 확인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의 부재가 위안이 되는 삶이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의 손을 놓아준 힘만큼
당신도 누군가의 손을 가장 큰 힘으로 잡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노래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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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

카테고리 없음 2022. 8. 21. 09:08

평화담, 평화꽃못

이틀 뒤면 처서다. 벌써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 길턱이 느껴진다.

근 십여 년 동안 지냰 여름이 다 그랬지만, 올 여름 더위는 정말 지루했다. '지루하다'고 하지 않고 "지루했다"고 한 것은 체감하는 여름은 끝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막 시원하다거나 덥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감지할 정도의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정도다. 한 낮 두어시간은 여전히 덥다.

여튼, 벌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올 여름은 끈적임과 후텁함이 꽤나 두터웠다. 사나흘 전부터는 밤 공기가 달라졌음을 체감하고 있다. 한밤과 새벽 잠자리에서는 뒤척일 때 다리로 감고 있던 이불을 손으로 더듬어 끌어 당겨 어깨를 덮기 시작했다.

아침에 인나서 꾸물꾸물 해찰하다 안거에 안거 평화로 향했다. 뚤레뚤레 중앙로를 뚫고 군민회관오거리를 건너 한들을 지나면 나타나는 평화마을 입구에선 안거를 한비짝에 머끈다. 안거에서 인나 메타세쿼이아가 낸 짧고 지픈 질 앞에 서서 질 끝을 바라본다. 잠시 우두커니. 짧은데 깊은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밝은데 아득하다. 끝이 밝고 또렷한 '玄'으로 보인다. 가자. 그 끝으로.

꽃길 지나니 꽃밭이다. 아니지 밭이 아니라 꽃못이다.

아, 오늘 보니, 평화마을 송백정가 배롱나무는 물 속에서 꽃을 피우고 물 밖에서 꽃잎을 한번 더 피워내는구나!

그래, 이름을 지어서 부르자. 지금부터 여기는 평화꽃못, 평화담이다.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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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辦托鉢삼판탁발

악양 평사리문학관에서 ‘기후위기 시대에 읽는 박경리 의 시’를 주제로 법회를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평소 관심을 두고 있는 내용인데다 궁금하던 선지식(오민석 교수님)이 주제발표를 하는 법회라고 해서 안거에 안거 안거하는 탁발행선에 나섰다. 이른바 삼판탁발이다.

이판과 사판의 가운데 안에 삼판이 있고, 그 밖에 오판이 있다. 삼판은 이판도 아니고 사판도 아니지만 이판이면서 사판인 것이 삼판이다. 이판과 사판의 판은 ‘가르고 판단하는 판判’을 쓰는데, 삼판의 판은 ‘힘쓸 판辦’을 쓴다. 오판은 悟辦오판이다. 삼판과 오판은 입전수수의 선택에서 비롯한다.

(뜻은 참판, 읽을 땐 삼판으로 하는)參辦삼판은 참견하고 간섭[지배, 소유]하는 뜻으로 쓰는 간여(干與)를 말하는 게 아니라 참여하고 관계[연대, 공유]하는 뜻으로 쓰이는 관여(關與)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삼판수행은 깜냥껏 관계하고, 힘껏 참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삼판탁발은 사람스러운 사람들이 사는 俗에서 하는 것이다. 비록, 관계에서 비롯한 주관의 판단을 일방으로 적용해서 쓰는 것이 사람스럽다는 말이지만 그래도 쓴다. 내가 지향하는 삶이니까.

서두가 장황했다.

궁금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읽는 박경리의 시”라니. 토지도 드라마를 통해서 대강만 알고 있을 뿐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그러니 박경리 선생님이 ‘토지’말고 ‘시’를 남겼다는 것도 시집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호기심 많고 오지랖 넓다고 하지만 정작 모르는 것 투성이다. 시집 <우리들의 시간>과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두 권 주문했다. 5부 25편으로 완결됐다는 ‘토지’도 읽어봐야겠다. 빌려서 읽든 사서 보든.

#

“견디기 어려울 때 시는 위안이었다.”고 한 <못 떠나는 배> 서문의 첫 문장을 시작으로 한 오민석 선생님의 법문은 마지막까지 아름다웠다.

그대는 사랑의 記憶(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時間(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天刑(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肉體(육체)를 去勢(거세)당하고
人生(인생)을 去勢(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眞實(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박경리의 시 <사마천>을 마치 “정구업진언(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처럼 읽고 법문을 시작하는 것 같다.

“진실”의 기록을 위해 몸과 삶이 거세 당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던,
사마천의 “글쓰기의 길”을 메타포로 한 박경리가 생각하는 진리란 무엇일까.

법문의 핵심은 “參與(참여)”였다.
법문의 내용은 “세계를 대하는 박경리의 시적 격자poetic grid”이고 “그것(시적 격자)에 포착된 세계의 풍경들”이라는 것이다.

첫째 참여는, “‘악을 녹이는 독’으로 악에 대한 승리를 지향”하는 것이고,
둘째 참여는, “‘청풍 부르는 소리’로 문명을 넘어서 문명 혹은 문명 이전의 자연을 호명해내야”하는 것이고,
셋째 참여는, “‘사랑’, ‘눈물’을 전제로 대상에 대한 통감과 애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넷째 참여는, “그 무엇보다도 ‘생명 / 다독거리는 손길’로 생명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문을 듣고 나니 단순하고 명쾌해졌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악은 물리치고
선을 지어가기

불쑥, “앙가주망engagement”이, 어떤 ‘사람’이 떠오른다. 스스로 ‘악을 녹이는 독’이 된 앙가주망, 조국 전 법무부장관과 그 가족의 삶에 한없는 통감과 애정의 마음으로 경의를 표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그대가 조국>을 봐야겠다. 이렇게하는 것으로 ‘참여’를 할 수 있다면.

#

붓끝에/악을 녹이는 독이 있어야/그게 참여다//붓끝에/청풍을 부르는 소리 있어야/그게 참여다//사랑이 있어야/눈물이 있어야/생명/다독거리는 손길 있어야/그래야 그게 참여다 <문필가>

이문재 선생님의 시 <오래된 기도>처럼 이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참여”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이”라면 좋겠다.

#

강자의 발을 핥는 자는/반드시 패도覇道를 꿈꾸고/그가 치는 승전고는/피바다를 예고한다//욕망의 계곡을 누비며/연민도 없이/눈물도 없이/채워도 채워도 허기진 자/그들로 인하여/역사는/민초의 피로 얼룩져왔다 <피>

“박경리 선생님은 사적 공간에서도 늘 공적 영역을 사유한다”고 하고, “골방이 썪을 때, 광장이 무너지며, 광장이 타락할 때 골방도 병에 든다.”고 한 오민석 선생님의 말씀에서는 “어리석음과 탐욕, 성내는 마음으로부터 내 병이 생겼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병에 걸려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만일 모든 중생들의 병이 나으면, 그때 내 병도 나을 것입니다.”라고, 유마힐 거사가 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영원한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는 개인은 결국 자본주의라는 공적 시스템이 만들어 낸 것이”이고, “연민도” 없고 “눈물도” 없는 개인과 자본주의라는 공적 시스템을 연결하는 통로가 바로 ‘악’인데, “악에 대한 승리를 지향하는” ‘참여’는 이런 “악”과 싸우면 그것을 ‘녹이는 독’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

돌팍 사이/시멘트로 꽉꽉 메운 곳/바늘구멍이라도 있었던가//돌바닥에 엎드려서/노오랗게 핀 민들레 꽃/씨앗 날리기 위해/험난한 노정路程/아아 너는 피었구나 <민들레>

‘바늘구멍’마저 사라질 미래에 ‘돌바닥’과 싸우는 '험난한 노정’에서도 ‘붓끝에/악을 녹이는 독’처럼 ‘참여’한 ‘민들레’의 선한 싸움을 보고 문학은 감동의 찬사를 보내는 것이라고 하였고,

아아
굶주림 같은 풍요로움이여
쓰레기 더미 같은 풍요로움이여
죽음에 이르는 풍요로움이여
눈물이 배어들 땅 한 치가 없네

<현실 같은 화면, 화면 같은 현실>의 한 부분과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히말라야의 노새>의 한 부분을 읽어주면서

“문학은 눈물의 언어이고, 곡비哭婢의 언어이며, 사랑의 언어이다.”라고 하는 오민석 선생님은 “(은유의 세계로)언어가 확장될 때 아프고 병든 자연은 동시에 아프고 병든 인간임을 지각”하게 된다고, 그래서 시는 ‘쓰레기 더미 같은’ 가짜 ‘풍요’를 통감하는 눈물로써 애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법문을 한다.

#

뙤악볕 아래/밭을 매는 아낙네는/밭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온 밭을 끌어안고 토닥거린다//밭둑길 논둑길이 닳도록 오가며/어미새가 모이 물어 나르듯 오가며/그것이 배추이든 고추이든/보리콩 수수 벼 어느것이든 간에/모두 미숙한 생명들이니/아낙에게는 가슴타게 하는 자식들이다 … (중략) … 밭을 끌어안은 아낙네는/젖줄 몰려주는 대지의 여신과 함께/번갈아 가며/생명을 양육하는 거룩한 어머니다 <농촌 아낙네>의 부분을 꺼낸 오민석 선생님은

박경리의 세계관 혹은 우주관은 ‘대지의 여신’과 ‘아낙네’ 그리고 ‘농작물(들)’을 순환고리로 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 순환고리를 이어주는 핵이 바로 ‘생명’이라는 것이다. “부분이 전체를 부르고 전체가 부분을 부르는 관계의 총화”를 총체성이라고 하는데, 박경리의 ‘생명을 양육하는 거룩한 어머니’를 사라진 생명의 총체성을 복구하는 문학으로 읽어준다. 그러면서 박경리(의 시) 문학의 최종 무게중심은 생명에 있다고 한다. 박경리가 골방(의 사적 영역)에서 광장(이라는 공적 영역)의 사유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경리(의 시) 문학에 배어있는 생명을 꺼내서 읽어준 오민석 선생님의 법문에 감동하고 감탄할 수밖에.

#

문학의 자리에서 볼 때 기후위기 시대는 단지 기표로 나타나는 자연 기상(氣象)의 문제만이 아니다. 자본과 자연, 노동자와 자본가의 복합적 기의를 가지고 있는 기후위기 시대이다.

오민석 선생님이 박경리의 시에서 꺼내준 것에서 볼 수 있는, 네가지 ‘참여의 격자’를 통해서 진단해보자면, 기후위기 시대는 ➀악[자본]의 승리이고, ➁자연의 패배이며, ➂통감과 사랑의 사라짐이고, ➃생명성의 죽음이다.

문학은 어떻게 대응 할 것인가.
오민석 선생님은 박경리의 시를 읽어보니 보이더란다.

‘모든 부분은 전체의 부분이며, 모든 전체는 부분의 전체’이고, ‘지구가 병들면 어떤 개체도 행복할 수 없다’는 총체성의 사유[박경리의 우주관 혹은 세계관]가 필요하다.

“문학은 내용이면서 표현”이라고 한 오민석 선생님은 “다양한 문학 표현의 시도가 있어야한다”고 한다.

#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
사위는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고
우리 식구는 기피 인물로
유배지 같은 정릉에 살았다
천지간에 의지할 곳 없이 살았다
수수께끼는
우리가 좌익과 우익의 압박을
동시에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만큼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
뼈가 으스러지게
눈앞에서 보아야 했던 세월
태평양전쟁 육이오를 겪었지만
그런 세상은 처음이었다
악은 강렬했고 천하무적이었다

<어머니의 사는 법> 부분을 읽으면서

‘좌익과 우익의 압박을/동시에 받았’던 박경리는 오히려 생명성을 핵으로 삼는 총체성의 세계관과 우주관의 시로써 ‘강렬’하고 ‘천하무적’인 악과 싸운 것이라고 한다.

#

오민석 선생님은 박경리 시의 행간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행간을 받쳐주는 바탕에 관정을 뚫고 바탕을 받쳐주는 ‘것’을 밖으로 꺼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보니,
처음 가 본 평사리문학관 건물에서 걸려있는 <문학 & 생명> 편액을 <참여>로 읽어도 될 것 같다.

<문학>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다양한 표현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참여라고 할 수 있겠고,
<생명>은 총체성의 사유로써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다독거리는 자비로운 손길의 참여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참여 혹은 앙가주망이 내 공부[수행하는 삶]에서는 삼판參辦이다.

이렇게 악양 평사리문학관의 <문학&생명> 법회에 參辦托鉢삼판탁발 가서 ‘참여參與’를 나름 깜냥껏 공부했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사바하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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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22. 6. 3. 07:14

길 가는데
갈림길 나타나면 멈칫.
누구나 그렇지는 않지.

저기
가는 길에 나타난 여기

어느 길로 가든 저기에 닿지
저기가 어딘지 왜 가는지 알고 있다면

까치발 해서라도
너머가 보이면 담
그렇지 않으면 벽

그래서

돌담 넘에가지 않고
돌벽 따라 난 길 돌아 걷는다.

모든 길은
너머에 가 닿(으려)는 길이다.

아제아제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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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22. 5. 31. 15:22



틈 없고
자리 없는 것 있을까마는

송곳 꽂을
자리가 없다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을까

송곳이라도 있었으니

#

거미가 없어서 거미집이 녹슨 것인지
거미집이 녹슬어서 거미가 떠난 건지

몸이 까맣게 타버린 거미처럼
까맣게 녹슨 철조망도 설움에 늙은 것일까

김수영이 바라는 것과
윤동주의 사는 까닭은

ㆍㆍㆍㆍㆍㆍ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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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燈

카테고리 없음 2022. 5. 28. 10:52

觀燈(관등)

봄녘, 남끝으로 가면 남포가 있다.

남포에 가서 바다를 향해 앞을 보면
작은 등잔처럼 생긴 섬 하나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소등섬이다.

돌바위 소등섬에는 소나무 몇 그루 있는데
상투처럼 솟은 모양이 꼭 등잔의 심지 같다.

소등섬 소나무심지에 '촛불' 같은 '햇불'이 켜져서 아침이다.

이 섬에는 남쪽 바다를 향해 기도하는 할매 한 분이 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부나 한결 같은 자세로 기도하는,

소등할매

#

남향(南向) / 이문재

그때는 그 사람이 남쪽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한 문장이 정남향이었습니다
덕분에 한 시절 잘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봄이 이듬해 봄 만나기를 서른몇차례
많은 시대가 한꺼번에 왔다가 사라졌습니다
오래된 미래는 더 오래가 되었고
온다던 미래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렸습니다

꽃 진 자리에서 하늘을 보며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남쪽일 수 있을까요
우리들은 어느 생에게 정남진일 수 있을까요

그때는 여기 저기 남쪽이 많았습니다
더불어 함께 남쪽을 바라보던
착하되 강하고 예민하되 늠름한 벗들이
도처에서 서로 부등켜안고 그랬습니다

남쪽은 저기 여전히 맑고 푸르러 드높은데
이 겨울이 봄 여름 가을을 건너뛰어
다음의 긴 겨울을 만나고 있습니다
처음 같은 마지막처럼

<혼자의 넓이, 창비>

#

무심하면 지나칠테지만 자세히 보면 이 소등할매 형상이 독특하다.
손바닥을 맞대는 합장이 아니라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쥔 모양이고,
무릎은 꿇고 엉덩이는 들어올려 長跪(장궤)를 한 채 기도하는 모습이다.

사실 소등할매의 이런 기도자세와 손모양이 나에게는 익숙하다.
어릴 때부터 인덕법단(일관도, 국제도덕협회)에서 익힌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이 소등할매 모습이 낯설고 궁금하다.
이 할매 형상을 만드신 분은 누군지, 어느 할매를 본으로 했는지.

아, 그리고 小燈섬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굳이 素燈섬이라고 부른다.

소등섬에서 심지처럼 장궤를 한 채
남쪽을 바라보며 觀燈 기도하는 소등할매는
누구든지 옆에 오라고
자리를 내어주고 뒷자리도 내어준다.

觀燈하듯 정남을 바라보자고.
觀燈하듯 앞을 오래오래 보자고.
기도하자고
素燈할매가 온 마음을 보여준다.

#

소등할매를 곁에 두고싶어서 민에게 부탁했다.

https://www.instagram.com/p/CdAk62WLrw4/

향꽂이 목각 소등할매가 왔다.
향을 감싸쥔 소등할매를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

觀燈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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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如來 與 如去여거

“모든 새싹이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마음을 주는 사람을 향해 저리 기울어지는 것”이니

<사람이 온다>를 기다린 것은

“들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

“책 5권 도착”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고 문화당에서 보낸 문자메시지를 본 게 지난 달 14일이었으니 달포도 더 전이다. 책을 주문할 때의 기쁨과 받을 때의 즐거움만한 게 또 있을까. 어제서야 문화당에 가서 책 5권 받았다.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적금을 찾는 느낌도 이럴까?

그리고 <인간의 악에게 묻는다(김성규, 책이라는 신화)>를 주문했다.

#

“칙칙하고 암울한 장면을 보고 견뎌야 하는 인내심이 필요한 시간이" 더 이상 필요 없을 “‘사회권 선진국’을 향해,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 여래처럼 왔다.

책책책책 책을 쌓았다. 오층책탑이다. 쌓아 놓은 책을 보는데 책 표지가 거울처럼 보였다. 그 거울에 비친 책표지가 허세 그리고 허영의 페르소나 그리고 임포스터로 보였다. “가불”한 ‘나’를 본 것이다. 가불은 빚이다. 빛을 (내)보겠다고 빚을 낸 것이다. 빚이 빛을 가리고 있다. 빚을 갚으면 그리고 빚에서 벗어나면 ‘나’의 본래모습이 나타날까? ‘나’는 본래모습을 볼 수는 있기나 하는 것일까?

#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etre)’라는 동사를 부여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다’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 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서론: 리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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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물리학 그리고 양자역학 그리고 뇌과학 그리고 인지심리학 등에 관심에 짙어지고 있다. 김상욱 그리고 김대식 그리고 정재승 그리고  장동선 그리고 김경일 그리고 …… 그리고 …… 헤겔 그리고 들뢰즈 그리고 동학을 유튜브에서 그리고 줌에서 마치 백고좌 법회를 하는 것처럼 공부하고 있다.

1979년 겨울, 흑석동 용두봉 인덕법단 참선방에서 느낀 그리고 정한 ‘두께 없이 투명한 양면’ 같은 ‘繼開의 한 점’으로 수렴하(려)는 그리고 발산하(려)는 공부를 하고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부분이 없는 것”이라는 ‘이 점’은 내 사유의 바탕이 된 뒤로 단 한순간도 변한 적이 없고 없어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뉴턴의 아틀리에-물리학의 눈으로 본 미술’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점과 선을 이해한다면 그림 속의 수학과 과학, 더 나아가 인간의 본질까지도 읽을 수 있다.”고 한 김상욱 교수의 말을 반갑게 들였다.

#

사람에게 간 것은 호기심이었다. 오지랖인 줄 알았는데 번번이 오지랖의 탈을 쓴 날카로운 호기심이(되)었다. 사북선처럼, 그물처럼 넓게 퍼지는 호기심인줄 알았던 그 호기심은 끝이 뾰족했다. 탱자나무 가시처럼 날카로웠던 이 호기심의 끝은 번번이 부메랑처럼 나를 찔렀다.

그래도 다시 사람에게 간다. “방문객”처럼 오는 사람을 기다리면서 사람들이 사는 俗에서 사람스럽게 사는 사람들 俗으로 간다.

‘사람’은 선(하기도)하지만 페르소나 그리고 임포스터의 “인간(人間)은 악이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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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주

카테고리 없음 2022. 1. 31. 17:14

공양주

처음 만든 음식은 라면이었다. 그리고 김치찌개. 냄비밥도 지어봤고, 달걀후라이도 만들어서 상을 차렸다. 홍은동 쌍둥이네 셋방 살 때다. 그때는 연탄불로 했다.

79년에 서대문중학교 입학하고 몇 달 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다음해 경기상고에 입학한 형 학교 다니기 좋도록 통인동으로 이사했다. 집주인은 양복점을 했는데 길가 전방처럼 양복점이 있었고, 양복점 문과 나란히 셋방 출입문이 있었다. 문 열면 바로 부엌이고 왼쪽으로 방으로 들어가는 미닫이 문이 있는 부엌이 딸린 단칸방이었다. 변소는 밖에 따로 있었다. 세운상가 맞은편에 있던 공작고전의상실에서 한복 바느질을 하셨던 황모님은 이틀이 멀다고 밤새워 일을 하시기 일쑤여서 부엌 살림은 대개 내가 했다. 가지볶음 반찬은 통인동 살 때 처음으로 했다. 그땐 석유곤로에 후라이판 올려놓고 했었다. 그래서인지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오뎅볶음 반찬이 하나 더 늘었다.

두 해 그렇게 살다 흑석동 인덕법단에서 사신출가 생활을 했으니 부엌 살림하곤 거리가 멀었다. 시내버스 노동자로 지낼 때 자취를 했지만 국 끓여 먹는 정도였지 따로 반찬을 만들어 먹거나 요리를 해먹지는 않았다. 무생채를 버무려서 두고 먹는 게 다였다. 그래서 지금도 무생채는 곧잘한다. 쨌든 식욕은 왕성했어도 뭘 먹고싶은 게 있다거나 하지 않아서 성가신 건 없었다. 그저 허기만 가시면 그만이었다.

조금전에 불쑥 뭔 요리?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김말이튀김을 만들어 보려고 상상을 하면서 마트에 가서 재료를 준비했다. 라이스페이퍼에 김을 올려놓고 그 위에 잡채를 얹어서 돌돌 만 다음에 후라이팬이 볶듯이 튀겨볼 요량이었다.

잡채는 대충 만들었다. 적은 것 같아서 조금 더 했는데 막상 만들면서 보니 처음에 준비한 것도 많았다. 맛을 봤더니 간은 좋았다. 깻잎을 넣어서 향도 괜찮고. 이제 잘 말면 될 일이다.

역시 어설펐다. 처음엔 꽝. 다시 또 꽝. 엉성하다. 자꾸 엉성하다. 사각으로 된 라이스페이퍼인데 처음에 반듯이 놓고 했더니 옆으로 삐져나오는 잡채가 수습이 안 됐다. 다섯 번의 엉성함 끝에 모로 놓고 했더니 딱이다! 그때부터 모양이 제법 나왔다. 준비한 김은 4장이었다. 4등 분을 하면 16개를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 만들고 보니 15개다. 한 개가 어디로 사라졌지? 잡채가 많이 남아서 하나는 김 없이 바로 말아봤다. 얼추 괜찮게 보인다. 영 똥손은 아닌 것 같다.

말아 놓은 말이를 조금 마르게 뒀다가 후라이판에 기름을 두껍게 두르고 튀기듯 부치듯 집개로 뒤집어가면서 고르게 튀겨지도록 했다.

남은 잡채도 후라이판에 넣고 볶았다. 뜨거울 때 바로 먹으니 맛이 겁나 좋다.

처음 한 김말이튀김이다. 공양주 흉내라도 낼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랑 먹을까?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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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일

카테고리 없음 2022. 1. 31. 08:59

옛일

두 달이 지난 것 같다. 그 사이 통화는 서너 번 했을까? 이틀 전에 전화를 드려서 간다고 말씀을 드렸고 자응서 나서면서 전화를 드렸다. 12시 반쯤 됐을 것이다. 한 시간 남짓 걸릴 거라고. 싸목싸목 천천히 가겠다고 하고, 가서 점심 공양 할 거라고 말씀드렸다.

명절 연휴는 달력에서만 있는 빨간색일 뿐, 길은 평소처럼 한가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제한 속도를 넘지 않으면서 안거를 정속으로 다뤘다. 콩앱을 열고 안거에 연결했다. 생클을 듣는데 익숙한 곡들이 흘렀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가 교도소장 방에서 모차르트의 음반 피가로의 결혼을 발견하고 꺼내서 레코드판 먼저를 털어내 턴테이블에 올리고는 잠깐 음악을 듣다가 이내 문을 잠근 다음에 마이크를 켜서 스피커에서 나오는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 – 편지의 2중창’을 확성기를 통해 쇼생크 마당에 퍼지게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드러누운 것처럼 편하게 의자에 안거 팔베개를 한 채 음악을 듣는 앤디는 교도소장이 문을 깨고 들어와 끌어낼 때까지 쇼생크의 모두가 자유를 느낄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안거 스피커 볼륨을 끝까지 높이고 안거 창문을 내렸다.

졸음에 겨워 함평휴게소에 안거를 멈추고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평소 1시간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쉬엄쉬엄 2시간 걸려 황모님을 뵀다.
남은 이가 몇 개 안 돼서 사과를 조각조각 콩만하게 잘라서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우물우물 하고 계셨는데 그나마 넘기지를 못하고 뱉어 내신다.

여느 때 같았으면 넓은 냄비에 찌개를 새로 끓여놓고 밥도 새로 지어놓고 계셨을 텐데... 뭐가 없다고 라면 끓여서 밥 말아 먹을 거냐고 하신다. 몸을 무겁게 일으키시면 부엌으로 가시는 황모님 뒤를 따랐다.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가 있어서 뚜껑을 열어보니 한 대접 정도 남은 미역국 끓여 놓은 게 있었다. 뜨거운 물 한 대접 더 붓고 라면(오신 채 안 들어간 ‘채식청정면’) 한 개 끓였다. 늘 해주시던 황모님이 고창에서 부엌(불)을 허락해주신 건 처음이다. 식은밥이라도 먹을 거냐고 하셔서 밥솥을 열어봤다. 아침에 한 것처럼 보이는 보온밥솥의 밥에서 미지근한 김이 희미하게 올라왔다. 조금 덜어진 걸 보니 한 주걱정도 드셨나보다. 몇 번의 전화 통화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하신다. 처음 듣는 것처럼 황모님 말씀을 봄동 겉절이 반찬인양 삼아 미역국라면 한 대접에 밥 두 주걱 말아서 점심공양을 했다.

공양을 하고 나니 속바지 안주머니에서 쌈지를 꺼내시더니 두 번 접힌 지폐 뭉치를 꺼내신다. 오만 원짜리 한 장, 만 원짜리 한 장, 천 원짜리 몇 장이 삼등분으로 접힌 지폐뭉치다. 천 원짜리만 남기고 지폐 두 장 펴서 주신다. 천 원짜리 지폐를 천천히 세시더니 칠천 원이나 남았다고 웃으시면서 다시 그대로 두 번 접어서 쌈지에 넣고 속바지 안주머니에 넣으신다.

기묘(己卯)생, 올해로 여든넷을 사시는 황모님. 겨워 보이신다. 옛일은 가고 새일이 오는 것이 한 생이라지만, 점점 고요해지는 한 생을 보는 내 연민이 가엽다.

배웅하시겠다고 느릿느릿 나오시는 황모님을 기다리는데 문 옆 더미 위에 둔 호미며 장갑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텃밭 둘레가 참 가지런하다. 햇살이 좋아서 사진을 찍었다. 이 순간.

태어난 불갑 선들을 지나가고 싶었다. 가는 길에 영광 외갓집을 들렸다. 대목수를 하셨던 외할아지가 직접 지으신 집이란다. 아직도 여전한 외갓집 대문과 뒤안 우물을 보니 50년 전 예닐곱 살 때 기억이 떠오른다. 두 살 터울 형과 황모님 혼례 치르는 날 태어났다는 네 살 많은 막내 외삼촌과 지냈던 외갓집이다. 공작새도 키웠던 정원이 참 예쁜 외갓집이었다. 10남매 맏이인 황모임은 아홉 동생들 중 셋은 먼저 보내고 여섯이 남았다.

국민학교 다닐 때 방학이면 큰집에서 며칠 외갓집에서 며칠을 지냈다. 황모님이 여름엔 모기가 많다고 안 보내셨고 주로 겨울에만 보내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여름에 갔던 기억도 제법 있다. 내가 태어난 자리는 선들 뒤 ‘후동’이라는데 ‘불갑면 녹산리 456번지’가 내 본적지다. 지금은 사촌 누이가 하는 ‘덕산가든’ 간판이 걸린 선들 큰집은 불갑저수지 아랫마을이다. ‘선돌이 있는 들’이라고 해서 선들이라고 하는 것 같다.

냇가에서 놀면서 잡은 송사리 몇마리를 고무신 벗어 그 안에 담아서 큰엄마한테 갖다드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는 깊지 않았다. 키가 작은 어린 내 무릎이 잠길 정도였다. 겨울엔 내가 얼었는데, 얼음에 구멍을 숭숭 뚫고 얼음판을 발로 쿵쿵 밟으면 그 구멍으로 송사리가 뿅 올라왔다. 뚝방에 불을 놓고 그 불에 송사리를 던져서 굽기도 했다. 열 살 무렵 그렇게 놀았다. 겨울밤이면 외양간 옆 사랑방에 그야말로 옹기종기 모여서 고구마를 깎아 먹었고, 당숙모가 하는 전방에서 사탕이며 과자를 사다 먹으면서 민화투 놀이도 했다. 마주앉아 이불 속에 발을 넣고 다리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다 하나씩 빼는 놀이도 했다. 볏짚 잘라서 김 푹푹 나도록 소죽도 쒀 봤고 밤새 먹은 고구마껍질하고 쌀겨를 물에 섞어서 돼지여물도 줘봤다. 큰집에 대한 기억 중에 선명한 것들이다. 그때 ‘오째’라고 불렀던 또래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문득, 어쩌다 이렇게 반세기 전 옛일을 기억하고 겨우겨우 더듬더듬 떠올리고 있는 내가 잠깐 슬펐다. 섣달 그믐이라 그렇다.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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