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깔 마동욱 선생님이 어딜 같이 가자고 하신다. 졸립다고 나더러 당신 차를 운전하라더니 운전석을 비우고 동반석에 안거 어서 가자고 재촉하신다.
유치 봉덕 보현암 지나고 한참을 더 가서 왼짝 산길로 틀었다. 바위 계곡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누가 마중나온다. 차에서 내려 깔끄막 산길 오르더니 오른쪽 대숲으로 안내를 한다.
대숲 한비짝에 배구공만한 타조알 처럼 생긴 둥글고 하얀 덩어리 두 개가 보인다.
댕구알버섯이란다.
댕구알버섯을 발견한 분이 빛깔 선생님한테 전화를 해서 가져가라고 한 것인데, 희귀종인데 최근에 얼마에 팔렸다고 하면서 직접 캐 가라고 한 것이다. 크기를 재 볼 요량으로 댕구알버섯 옆에 손을 댔는데 댄김에 나더라 캐라고 한다. 폭신한 느낌의 버섯을 두 손으로 감싸서 조심스럽게 캤다. 큰 건 내 머리통만하다. 필요한 분께 드리려고 조심스럽게 감싸서 산을 내려 왔다.
검색을 해보니 이런저런 정보가 많다.
나는 잘 모르겠다.
희귀종이이라서 플라시보 효과가 있으려나?
자로 재보니 큰 건 지름은 25cm 정도 둘레가 73cm 쯤이다. 작은 건 지름이 18cm 정도다.
나는 부여 능산리에 있는 烏石山오석산을 1991년부터 悟聖山오성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곤수곡인 스승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해발 180m인 悟聖山은 烏山오산, 烏石山오석산, 烏積山오적산이라고도 한다.
오성산 아래 복숭아밭 가운데 있었던 능산리 승묵법단을 처음 온 게 40년 전이다. 운전면허증을 따기 전 해이니 1984년이겠다. 김일주 노점전사와 강해성 점전사가 주재로 있던 초가집 법단이었다. 강해성 점전사 짐을 실은 포터 트럭 가운데 앉아 천안을 거쳐 차령휴게소에서 쉬고 공주를 지나 부여읍 능산리까지 무려 다섯 시간도 넘게 걸려 도착했다.
검개 그을린 부엌의 낮은 부뚜막 아궁이에서 가마솥에 밥을 짓고 숯을 꺼내 그 위에 냄비를 얹고 오다가 산 손두부를 넣고 끓여준 김치찌개로 저녁 공양을 했는데, 그 풍경과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989년 1월 말에 군 제대를 하고 부여 왕릉 맞은편에 있는 오성산 승묵법단에서 1991년 이맘 때까지 살았다. 산에 잣나무 묘목을 심어서 해마다 여름이면 예초기를 메고 온 산을 더듬고 다녔었다. 다행히 벌에 쏘인 건 몇 번 뿐이었다. 그 잣나무들이 지금은 아름드리가 되었다. 예초기 업력이 꽤 오래되었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말이다.
추석이 앞이고 추석 쇠고 열흘 뒤면 昆水谷人곤수곡인 스승의 反白成道日반백성도일이다. 준비를 하느라 종단 捨身修行者사신수해자들이 벌초 울력을 하려고 모였다. 40년을 봐온 도반이 있고 30년 20년 10년을 봐온 도반들이다. 오늘 하루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곳 부여에서 이틀 장성 방장산 진덕법단 수양원에서 하루를 더 하는 이박삼일 일정이다.
이나마 오늘 장흥 일정을 취소하고 왔는데 내일은 다시 장흥 일정을 봐야해서 모레 장성 방장산 진덕법단 수양원 울력은 함께할 수 있겠다. 이 일이 우선이어야 하는데 어쩌다 장흥 일정을 우선하고 있다. 어쩌겠는가 흐름대로 해야지.
군데군데 어린 소나무가 보인다. 예초기를 돌리다가 흠칫 놀라서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 봤다. 어떤 것은 올해 나온 것이고 어떤 것은 이삼년은 자란 것이다. 작년에 누군가도 나처럼 멈칫했었겠구나 생각을 하니 같은 마음 같아서 뿌듯하다.
그나 할거에 안거 다니다 보니 안거에 안거 다니던 때에 비해서 풍경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안거에서는 안 보이던 것이 할거에서는 보인다. 시야가 달라진 것이다. 시선의 층위가 달라지니 다른 층위의 풍경이 보이는 것이다.
관점은 같다고 하더라도 관점의 층위에 따라서 보이는 풍경이 있고 안 보이는 풍경이 있는 것이다. 내가 태어났다는 불갑(선들)을 지날 때 그랬다. 안거에 안거 다닐 때는 안 보였던 불갑저수지와 불갑천 그리고 선들이 할거에서는 한 눈에 보였다.
각자 흩어져서 예초기를 돌리지만 새참을 먹을 때 잠깐 쉴 때 모여 있으니 말 없이들 있어도 좋다. 흐믓하다.
황모님으로 말미암아 내 선택으로 사신한 종단, 국제도덕협회(일관도)는 오교(성인)의 성리심법(이라고 하는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 오교는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회교[이슬람교]를 말한다.
나는 (선험적으로) 알아서 선택을 했든, 선택을 한 뒤에 알게 됐든, 종단으로부터 배운 삼교합일이나 오교합일보다는 삼교본일이나 오교본일이라고 한다. 셋 다섯을 하나로 합한 것이 아니라 셋 다섯이 본디 하나에서 비롯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다.
捨身修行者사신수행자라고 하기도 하고
捨身出家修行者사신출가수행자라고 하기도 한다.
요즘은 出家僧侶출가승려 또는 捨身出家僧侶사신출가승려라는 말을 쓴다.
조금 복잡하지만, 내 공부로는
세상에서 세상을 떠나 세상 속 세상에서 사는 이가 捨身者사신자이고 捨身修行者사신수행자인 것이다.
나는 우리나이로 열일곱 살인 1982년 5월 5일(음력 사월 열이튿날) 곤수곡인 스승의 허락에 따라 龍頭峯용두봉 仁悳法壇인덕법단에서 박희열 노점전사님이 立願辦事입원판사하여 捨身立願사신입원을 했다. 내가 求道立願구도입원한 곳도 인덕법단이라고 한다. 세 살 때인 1969년이었다.
열일곱 살 때야 뭘 좀 알고 사신입원을 했다지만, 세 살 때는 뭘 알아서 求道구도를 하고 立願입원을 하였겠는가. 비록 내 기억에는 또렷하게 없지만 求道儀禮구도의례를 했었다는 것이고, 그로써 明師一指點명사일지점을 수지하게 됐다는 것이니 나는 그저 그리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알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내 사유가 비롯하고 있으니 이 점이 참으로 신묘하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이 말한 <상호부조론>을 떠올랐다가 곧바로 ‘녹색평론 김종천’ 선생님이 말씀하신 “밥”이 잇따라 떠오르더니, 오늘 하루 내내 이 “밥”이 염두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밥 / 김종철
‘밥’이라는 게 본래 공양이라는 뜻이잖아요. 자기희생이라는 뜻이죠. “너는 내 밥이야” 이러잖아요. 밥이란 게 희생이란 뜻이에요. "저 놈은 내 밥이다" 이런 말을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잖아요. 저 인간 내 맘대로 이용해먹겠다는 소리지만, 사실은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산다는 얘기거든요. 밥이란 게 원래 그런 뜻이에요.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만물이 저마다 누군가의 밥이 되어야 돌아가게 되어 있잖아요. 지금은 우리가 누군가의 밥이 되지는 않고, 저 혼자 일방적으로 먹으려고만 하니까 세상이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밥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해요.
내가 먼저 누군가의 밥이 돼야 한다는 거지요. 농사를 짓는 농부를 우리가 도와서, 농민들에게 우리가 밥이 돼줘야 해요. 그리고 농민은 우리들을 위해서 밥이 되고요. 이런 식으로 순환을 계속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의 밥이고, 아이들은 늙은 부모의 밥이 되어 부모에게 공양을 바치고... 이런 식으로 모든 존재가 모든 존재에 대해서 밥이 되는 것. 해월 선생이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아름다운 표현으로 말씀하셨잖아요. 한울님이 한울님을 먹고 산다고. 존재하는 모든 게 한울님이라고 하셨잖아요.
‘밥’을 절에서는 ‘공양(供養)’이라고 하잖아요. 절집에서는 “밥 먹는다”라고 안 하고 "공양한다”라고 하잖아요. 왜 그런 말을 쓰는지 사실 스님들도 정확히 아시는 분이 많지 않아요. 원래 예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공양’이라는 말은 본래 공희(供犧 이바지할 공, 희생할 희)라고 번역되는 힌두어 ‘야즈나(yazuna)’에서 온 말이거든요. '야즈나’라는 것은 자기를 바친다는 의미, 즉 희생이라는 말인데, <바가밧기타>에 보면 이것이 고대 인도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인 것 같아요.
우주의 질서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자기희생’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밥’이죠. “네가 내 밥이다” 이렇게 얘기하지 말고, “내가 너의 밥이다”, 이렇게 생각을 전환시켜야 해요. "내가 네 밥이다. 나를 먹고 네가 건강해져라.” 서로가 이렇게만 하면 모두가 행복해져요. 이게 바로 이천식천의 마음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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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참 반가운 며칠을 보내는 중이다.
덕분에 <부산지역 해고노동자 생계비지원을 위한 만원의연대>와 (사)부산인권플랫폼 파랑, 부산지하철노동조합, 부산지역공공기관노동조합협의회 등이 하고 있는 부산지역 해고노동자와 인권활동가를 위한 추석나눔 모금 운동에 조금이나마 “밥”을 부조할 수 있게 됐다.
며칠이 지났지만, 뭐라도 흔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 위 독서대에 전시해 둔 노기강의록(1973)을 집어들었다. 팔정도(八正道)를 떠올렸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진(正精進) 정정(正定). 군 입대 후 첫 종교행사 때 육군사관학교 군법당에서 처음 불렀으나 목이 메어 끝까지 다 부르지 못했던 찬불가 ‘보현행원’도 떠오른다. “내 이제 두 손 모아 청하옵나니~ ...... 오늘 세운 이 서원은 끝없사오리~ ”
爐期講義錄, 爐(冶)經
爐期講義錄을 나는 굳이 애써서 노경(爐經)이라고 하고 또 노야경(爐冶經)이라고 한다.
곤수곡인(昆水谷人) 스승은 1961년(辛丑年) 음)정월에 광주 보광법단에서 49일 간 법회를 열었다. 종단에서는 그 법회를 노기반(爐期班)이라고 한다. 노기강의록은 그 노기반 법회에서 곤수곡인[混俗(혼속)]이 강설한 법문을 모은 자료집이다. 이 노기반 법회 이후에 사신출가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왔다고 한다. 내 공부의 해석으로, 노기강의록의 핵심은 동로공야(同爐共冶)에 있고, 그 중 특히 <爐와 冶>에 있다. 이는 <爐>를 체(體)로 보고 <冶>를 용(用)으로 보려는 내 생각의 관성을 어찌하지 않고 그냥 두고 있음이다.
학술지(신종교연구)에 ‘노기강의록’ 관련으로 등재된 논문도 있다. 나는 생각만 활발하지 손과 발이 게으른 성향인지라 학술지는 언감생심이니 차치하더라도, 어떤 것에 대한 것이거나 무엇에 관한 것이든 나름의 해석[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그 생각[해석]의 바탕이나 해석을 정리하는 논문 한 편 안 써봤기에(논문을 쓸 줄도 모르지만), 이렇게 내 공부로 천착하고 있는 것에 관한 글이나 논문을 보면 기쁘고 반갑고 고맙기가 이루 말로는 다 할 수가 없다.
북공고(토목과)에 입학하고 두 달 지난, 1982년 5월 5일(음력 4월 12일) 수요일 낮(아마 오후였을 것이다.), 흑석동 용두봉(龍頭峯) 인덕법단(仁悳法壇)에서 사신입원(捨身立願)을 했다. 몸을 버린다는 뜻의 사신(捨身)은 출가(出家)와 같은 뜻이다. 이렇게 내가 사신출가한 날은 사월초파일, 그러니까 부처님 오신 날 사흘 뒤였다.
그저 절이 좋았다. 지금이야 법단이라고 하지만, 어렸들 땐 절이라고 했다. 그래서 절(인덕법단)에서 살고 싶다고 허락을 구했더니 곤수곡인 스승은 흔쾌히 허락했다. 지금도 문도관(問道館)에서 전인(前人, 곤수곡인)을 뵙고 인사드리던 그날의 모습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고 박희열 노점전사는 사신을 하지 않으면 절에서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사신입원을 하겠다고 했다. 곧바로 3층 법당으로 갔다. 법당에서 박희열 노점전사의 판사 집례로 사신입원의 의례를 하고 사신입원표문을 사뤘다. 생일이 한 달하고도 열흘이 지났으니 만으로 열여섯, 우리나이로 열일곱 살 때였다. 어느덧 사십이 년이 지났다.
그렇게 사신출가자로 살기 시작하던 그 다음해에 고 박희열 노점전사는 인덕법단에서 사는 사신출가자들을 법당에 모아 놓고 노경을 가르쳤다. 한참을 지난 뒤에서야 나는 이 노경을 스승 곤수곡인 종단의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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綜合釋敎各宗各派而言之 大致分爲佛學與學佛兩途
불교의 각 종파를 종합하여 말한다면 크게 불학과 학불의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佛學者 以名而定義 講之誰天花亂墜 不外世界名言 言之愈深 違道愈遠 故而百無一得
불학이란 이름있는 것 곧 불의 정신보다 형식적인 것을 대의명분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허명뿐 무실한 것이어서 비록 하늘에서 꽃이 어지러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달변으로 경서를 강론한다 할지라도 세계의 명언들을 모아서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고 말이 깊으면 깊을수록 도에서 벗어남이 더욱 심할 뿐이니, 그러므로 백에 하나도 얻을 것이 없다.
學佛者 以義定名 名列誰多 不外一佛 能融各宗 同爐共冶 故而萬無一失
학불이란 뜻 곧 부처님의 정신을 본받는 것을 대의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름은 비록 수다하게 벌여 있지만, 오직 하나 부처임을 벗어나지 않으며, 능히 모든 종파를 하나로 합쳐 한 용광로(鎔鑛爐)에 넣어 불릴 수 있으므로 만에 하나도 잃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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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부에서 곤수곡인 스승이 세상을 보는, 공부의 관점과 해석의 바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노경의 첫 문장인 ‘佛學與學佛兩途(불학여학불양도)’이다. 스승 곤수곡인이 학불(學佛)의 ‘이의정명(以義定名)’으로 정의한 이 ‘佛學與學佛兩途’는 이는 마치 ‘부분이 없(고 위치만 있)다고 점을 정의’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말하는 수학의 공리와 같다고 하겠다.
혼속(混俗) 곤수곡인 스승의 노경에서 공부한 이 <佛學>과 <學佛>, <爐>와 <冶> 그리고 <般若五悳(반야오덕)>은 내 생각과 지향의 전제가 되고, 전제의 전제가 되었다. 그로써 이는 모든 전제의 전제가 되는 메타전제로써 ‘화순 운주사 쌍배불’처럼 내 생각의 바탕과 지향하는 점이 되어 있다. 운주사의 쌍배불을 심우와 입전수수를 동시에 보여주는 십우도의 도상으로 여기고 있다.
혼속(混俗) 스승 곤수곡인은 중용(中庸) 20장에서 전하고 있는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독행(篤行)을 반야(般若)가 본디 갖추고 있는 다섯가지 덕(悳), 즉 반야오덕(般若五悳)으로 보고 있다. 이 悳은 直+心[忄, 곧 선 마음]으로 본디(마음이)라는 뜻이다. 곤수곡인 스승은 ‘옛 悳’이라고 하는 이 ‘본디 悳’과 ‘두루 德’을 변별[明辯]해서 쓰고 있다. 佛學과 같은 ‘두루 德’은 學佛과 같은 ‘본디 덕悳’이 움직여서 나타나거나 드러낸 흔적이다. 비유하자면, 이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로써 수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위치만 있고 부분이 없는 점들의 자취가 선인 것과 같다고 하겠다. 나는 혼속(混俗) 곤수곡인 스승의 ‘佛學與學佛兩途’와 ‘般若五悳’ 그리고 점을 정의한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를 혼속(混俗) 스승 곤수곡인의 가르침을 따라 學佛로써 同爐共冶하였기에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정했고 ‘스승의 날’이라고 정한 날이 지났다.
정한 날이 아이어도 나는 맨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고, 만날이 스승의 날이다.
십이시중 ‘般若五悳’하고, 맨날만날 ‘同爐共冶’하리.
오늘 44주년 5•18민중항쟁 장흥기념행사 음향을 준비하고 있는데 누가 다가와 미안해 하면서 봉투를 내민다. 엊그제 부처님 오신 날 지역 사암을 두루 찾아 참배를 했는데 나만 빠졌다면서… 마다할 시주가 아니어서 합장하고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일을 다 마치고 나서 옷을 갈아 입을 때 주머니에 뭐가 있어서 꺼내보니 땀에 절어 헤지고 축축한 봉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