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카테고리 없음 2020. 11. 20. 21:45

흔적 
 
그리고, 그래서 마중물 
 
이러했다. 고 대답한 흔적이 생겼다. 
 
물음에 대답한 설명에 부족한 부분이 있고, 아쉬운 부분이 있다. 표현에 거침이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의 맥락은 솔직했기에 내 흔적으로 감수한다. 
 
인터뷰 이후로 난 기사를 가만히 혼자 봤는데, 오늘 오후에 지인이 기사 링크를 보내줘서 핑계김에 공유한다. 
 
이와 같다. 
 
내 삶의
모든 흔적은 허물이었다.
허물로써 허물을 지우고,
허물로써 허물을 덮는다. 
 
"모든 결과는 비로소 과정이었다." 
 
// 
 
최근 논란의 핵심으로 떠오른 혜민스님이 가장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은 ‘건물주’나 ‘풀소유’여서가 아니다. 무소유의 가치를 전파하면서 자신은 가장 눈부신 현대사회 혜택을 온몸으로 받아낸 과거와 다른 ‘언행’ 때문이다. 
 
대표적인 모순이 조계종에서 승적을 받고 절 생활을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본인 명의의 단독주택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장면이 최근 브라운관을 통해 고스란히 전파된 것이다. 
 
“무소유의 가르침에 대한 무게감이 떨어졌다”, “차라리 무소유 코스프레를 들키지나 말지” 같은 비판이 적지 않게 이어졌다. 
 
혜민스님이 결정타를 맞은 것은 미국인 현각스님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으면서다. ‘기생충’ ‘도둑놈’ 같은 단어를 동원해 비난의 수위를 높이자, 혜민스님은 결국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16일 선언했다. 혜민스님은 “며칠 사이의 일들에 마음이 무겁다. 승려의 본분사를 다하지 못한 저의 잘못이 크다"고 사과했다. 
 
특이한 건 혜민스님의 사과 이후 현각스님은 바로 “아우님, 혜민과 70분 동안 마음을 나누며 통화했다”며 “그의 순수한 마음을 존중한다”고 화해를 내비쳤다. 그리고 사건은 무마되는 듯했다. 
 
하지만 진짜 무소유를 실천하는 스님들은 이 사건의 이면이 지닌 깊은 진실과 상처에 대해 우려를 드러낸다. 아직 끝나지 않은 숙제라는 얘기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출가한 곡인무영 스님은 ‘문화탁발’을 통해 사람과 교류한다. 불가에 귀의한 뒤 붓다가 실천한 삶의 흔적을 그대로 따라가는 ‘흔적이 지향’이라는 태도를 지키며 살아간다. 
 
혜민스님은 베스트셀러로 거액의 인세를 벌어들였지만, 곡인무영 스님은 ‘노동탁발’로 하루 ‘찡’하게 벌어 한 달을 연명한다. 
 
16일 전화인터뷰에서 ‘노동탁발’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전방 21사단 65, 66연대 철책을 오르락내리락 다니면서 등짐 지는 일을 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막일’로 탁발을 대신하는 셈이다. 
 
‘탁발에 왜 노동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곡인무영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자기 탁발 내미는 일을 소위 ‘삥 뜯는다’고 저는 표현해요. 제가 선택한 수행 노정에는 ‘노동’이 따라 붙었어요. 고급스럽게 포장한 단어가 ‘노동탁발’이죠. 종교의 관점에서 탁발은 미화돼 있거나 고급화돼 있죠. 일반인에게 탁발이 심지어 ‘위계적’으로 비칠 수도 있거든요. 생존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똑같아요. 종교의 노동행위도 결코 다르지 않아요. 일과 수행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지만, 일도 수행의 연장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혜민스님 사건에 대해 그는 “어떤 분이 ‘힐링 양아치’라는 표현을 썼는데, 일부 동의한다”고 했다. 
 
사람들을 힐링이라는 범주 안에 넣어서 그들을 주체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잠깐 위로받게 하고 그들 에너지를 자기 유지의 원천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워킹맘들에게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이 없으면 새벽 6시부터 45분 정도 같이 놀아주라는 주장도 했는데, 경험하지 않은 수행에 대해 해법을 제시하는 것도 ‘힐링 양아치’의 표본이에요. 사람마다 결이 다른데, 마치 해결사인 양 행동한 거잖아요. 그런 사례를 통해 다시 ‘나’를 돌아다보긴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곡인무영 스님은 혜민스님의 ‘건물주’ ‘풀소유’ 등과 관련해서는 “그것이 본질은 아니다”고 했다. 조계종에 승적했다고 꼭 절에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주지 스님이 공찰의 의무를 주지 않는 한 토굴이 아파트든 단독주택이든 상관없다는 얘기다. 토굴은 신도가 드나들지 않는 혼자 공부(수행)하는 공간을 일컫는다. 
 
“그것은 그가 가진 능력에 대한 자기 방식이기에 그것 자체를 판단하지 않아요. 문제는 ‘자의적 해석’이죠. 종교의 옷을 입은 사람이 그 옷으로 보이는 ‘표면’과 ‘이면’의 실체가 얼마나 같을 수 있는지 자기 식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얘기예요. 양두구육(羊頭狗肉·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처럼 매불자생(賣佛資生·부처를 팔아 자기 삶을 산다)이 승려의 삶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곡인무영 스님은 혜민스님이 사과와 뉘우침으로 이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무엇보다 자문자답으로 ‘솔직한 수행’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자기 이면을 꺼내서 표면에 덧대 일치화를 시키는 작업이 중요한데, 이 해결책이 윤색이 아닌 각색으로 ‘포장의 포장’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혜민스님 사건의 본질은 그가 건물주냐 아니냐의 진실공방이 아니라 그 이면에서 방하착(放下着·어떤 것도 유지하지 않고 내려놓는 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예요. 교수까지 하신, 불교의 상징적 아이콘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김고금평 기자 danny@mt.co.kr  
 
 https://m.mt.co.kr/renew/view.html?no=2020111622594517728&ca=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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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20. 3. 21. 22:40



눈을 잃어버린 과거부터
귀를 잃어버린 현재까지
입은 미래에서 침묵하지

않는 것일까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기



길에 나아갑니다.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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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판수행

카테고리 없음 2020. 3. 11. 05:12

마중물 - 삼판[參辦]수행

어제, 산판 일을 하면서 삼판수행을 생각했다.
(2016. 03. 11.)

삼판[參辦/참판]수행은 이판(理判)수행과 사판(事判)수행의 와중에서 이판사판을 아우르는 수행이다.
삼판(수행)은 이판(수행)도 아니고 사판(수행)도 아니다.
삼판(수행)은 이판(수행)이면서 사판(수행)이다.
삼판(수행)은 "일정한 논리나 기준에 따라 사물의 가치와 관계를 결정한"다는 뜻의 판단(判斷)하는 수행이 아니다.
삼판(수행)은 경계의 접점이고, 이 접점의 경계를 넓히는 수행이다.
삼판(수행)은 이판과 사판의 와중에서 이판과 사판을 꿰고 매는 수행이다.
삼판(수행)은 생각의 힘을 쓰는 일이고 손과 발을 맞춰서 함께 쓰는 수행이다.
삼판(수행)은 한 면은 대웅전을 향하고 다른 면은 일주문을 향하고 있는, 천불천탑 운주사에 있는 '석조불감쌍배불'과 같은 것이다.
삼판(수행)을 운주사 쌍배불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두께 없이 투명한 양면'처럼 한 데 있으면서 심우도를 통해서 말하고자하는 것과 같은데, 이는 수행의 시작과 결과인 '심우'와 '입전수수'를 한 자리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삼판(수행)은 동심원의 움직임처럼 끝없이 넓어지는 과정을 흔적으로 드러내는 나선형의 지향이다.
삼판(수행)은 그래서 '모든 결과는 비로소 과정이었다.'인 것이다.
삼(판수행)은 고타마 시타르타 붓다가 깨달은 법과 역대 선지식들이 가르친 법을 계개(繼開)하여 쓰는 혼속조사의 법과 그 가르침을 따라서 공부하는 것을 이른 말이라고 내가 정했다.
삼판(수행)은 내 것 잘 쓰는 일이고, 마을도량에 나투신 천백억화신 미륵고불과 어울리며 공부하는 마실수행이다.

어제, 산판 일을 하면서 삼판(수행)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더니,
이 일을 같이 하자고 소개해준 장흥 농민회 김동현 선생님이 한 소식 일러주신다.

"힘들재라?""
"예~ 조금요, 안 쓰던 근육을 써서 그런지 팔뚝 근육이 뭉치기는 하네요."
"......"
"......"
"그나저나 애를 봐주려면 언제까지 봐줘야 하는 줄 안가요?"
"......"
"애 엄마 올 때까지 봐줘야 하는 겁니다."
"뭔 뜻이 있는 말씀 같은데 무슨 뜻이예요?"
"이 일 끝날 때까지 계속 와서 일해야한다고요."
"일로 뭉친 근육은 일로 풀어야 한다는 건가요?"
"일 다할 때까지 와서 일 하시라고요."
"아~ 예. 그래야재라~ 그럴랍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는 인디언 기우제가 떠올랐고,
'공부하다 죽으라'는 선지식의 지향도 떠올랐다.
때마다 떠올리는 '모든 결과는 비로소 과정이었다.'는 여전히 당연하였다.

산은 가파르고 비탈은 험한데 베어 놓은 나무는 아직도 사방에 널려있다.
늪처럼 발이 빠지고 흔들거리는 너덜겅에서 뾰족한 돌 끝을 겨우겨우 밟고 피하고나면 넝쿨이 발목을 잡이 걸음을 더디게 하고, 그렇게나마 조금씩 움직일라치면 곳곳에 있는 시누대들이 디딤발을 미끄럽게 해서 중심을 무너뜨린다.

어제, 산판 일을 한 그 산의 바닥, 판이 그렇다.
오늘, 산판 일을 할 이 산의 바닥, 판도 이렇다.

온날 문화탁발행선의 만인불사는 산판 일을 마중물로 들여 삼판수행을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공부하는 마실수행자의 생각이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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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이, 삼, 사, 오
일[事]과 오[悟], 그 사이에서 하는 일~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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氣候(기후)와 火候(화후)

과잉의 기후위기와 결핍의 화후부족

지질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1만 년 동안 극히 미세하게 변하던 ‘홀로세’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인류세’의 시대가 되었다고 구분하고 있다. 중력으로 켜켜이 쌓이는 지구의 질[땅과 대기]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불[火; 생각, 욕망]을 쓰기 시작한 이래 산업혁명 이후 쓴 불[화석연료]에 따른 이산화탄소 배출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과잉욕망의 제국과 자본의 속성을 살피고 다스리지 않은 인간의 결핍이 만든 일이다.

인류세 시대의 기후위기는 과잉의 욕망[火]을 멈추지 못한 인간이 성찰의 결핍과 행동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다. 기후의 위기는 내 공부의 해석으로 火候의 부족이다.

火候는 불 살핌이고 불 다스림이다.
火는 생각[念; 관점(바탕과 지향이면서 욕망)]이고, 候는 살핌, 다스림이다.
火候가 부족한 인간으로 인하여 기후위기의 비상한 시대가 된 것이다.
懺悔(참회)의 행동을 할 일이다.

話頭(화두) 이전의,
念頭(념두)를 잡고, 火候로써 살피고 다스리면서, 懺悔의 행동을 할 일이다.

기후위기 비상행동 선언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 하겠습니다.”

어려서 절집[인덕법단]에 살면서 흔하게 들었던 말이 “지금 이 때는 삼기 말겁”이었다. 이 세상에 악을 한꺼번에 없애는 큰 심판[겁살]이 두 번 있었는데 하나는 물에 의한 水劫의 9년 홍수였고, 또 하나는 불에 의한 火劫의 7년 가뭄이었다. 이번 삼기 말겁에는 바람에 의한 風劫으로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이다. 劫殺(겁살)은 三災(삼재)를 말한 것이겠다.

공장 굴뚝이 내뿜는 ‘스모그’는 차라리 추억이 되었다. ‘미세먼지’나 심지어 전염되는 각종 ‘바이러스’도 바람으로 퍼진다. 인간이 일으킨 바람, 그 바람으로 인간이 사라지는 시대다.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해서 빨갛게 달궈진 지구의 중력으로 향하는 대기와 대류는 파란 하늘을 지우고 빨갛게 물들이는 인간의 욕망을 심판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미세먼지가 뒷골목 불량배라면 기후위기는 핵폭탄이다.”

기후위기에 비상행동으로 응답하는 사람들 속에 ‘꼭 낀 무영’으로 함께 있었고, “빨간지구에서 파란하늘을 꿈꾸”는 조천호 선생님 강연을 듣고 기다렸다 인사를 드렸다.

고맙습니다.

모임에서 노래를 부르라고 권하면 주저하지 않고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동요 ‘앞으로 앞으로’, ‘파란마음 하얀마음’이다. 매우 큰 소리로 아주 씩씩하게 온 마음을 다해서 부른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며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온날 기후탁발행선의 만인불사는 보이는 과학과 보이지 않는 종교의 화후부족을 참회하는 일이다.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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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님들의 선어는 왜 비유가 상냥하지 않고 불친절하고 배배 꼬여있는지요?”

 

손바닥도량에서 인연한 이상수 선생님의 물음에 답합니다.

 

수행자들은 스스로 공부하겠다고 나선 자들입니다.

공부는 이면과 바닥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여깁니다.

 

제 공부로는 '(切磋)琢摩'()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선사님들의 선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 3자의 입장에서 해석해야 하는 저도 마뜩잖습니다.

 

何以故 왜 그런가 하니,

如是 이와 같습니다.

是故 그러므로,

如是我觀 저는 이와 같이 헤아리고 살펴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1.

“‘선어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3자의 입장에서 해석해야한다든지 하면서 굳이 부연하였습니다.

 

그전에, ‘(불법과 변별하는)불교를 북방의 격의(불교)와 남방의 초기(불교)로 구분하는 걸 따릅니다. , 선어, 선어록은 주로(라고 쓰고 거의) 격의(불교)에서 씁니다. 격의(불교)를 선불교라고도 합니다. 붓다[Buddha; '깨달은 자', '눈을 뜬 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이야기한 법[Dharma]이 전해지는 방식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이야기한 법의 흔적(이라는 것) 중 하나를 금강경이라는 불서로 번역한 인도(서역)의 쿠마라지바(कुमारजीव Kumārajīva)’중국(동양)에서 구마라집이 된 것을 참고합니다. 더하여 번역은 오역이다.’세상은 해석과 설명이다.’라는 것을 念頭(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제 공부는 제 깜냥으로 선택하고 번역하고 해석한 흔적의 결과입니다. 제 공부로 들인 선어는 가리킴이고, 선어록은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저는 선어선어라고 하는 것[선어록]’으로 변별하고 있습니다. 선어가 불법이라면 불교는 선어록과 같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선어는 말 그대로 선[불법; 붓다(고타마 싯다르타)가 이야기한 법]에 닿거나 이르려고 하는 모든 짓을 말() 하는 것입니다. 선어록에는 말이 아닌 침묵과 몸짓도(선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어의 문답을 기록한 것이 선어록입니다. 이 선어는 붓다 고타마 싯다르트가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야기한 법에 관하여 공부하는 수행자들이 서로 문답하는 와중에 생깁니다. 공부하려고 마주한 두 사람이 각자 공부한 것으로 서로 묻고 답하는, 하고 하는 찰나, 공부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잇는 행간이 선입니다. 이 행간을 함의한 물음이 선어이고, 이 물음에 답하는 말[]이 선어입니다. 선어는 나, 나와 너의 1:1로 마주한 관계에서만 생깁니다. 3자의 해석(이나 평론 혹은 설명)이 아닌, 너와 나의 사이에서 생긴, 나의 정도에 관한 것이므로 내 공부의 결과로 상대에게 한 말이 선어입니다. 물론 기록으로 남겨 전할만한 문답이라는 누군가의 선택[해석]이 있어야 찰나로 증발하지 않고 전해겠지만요. 선어를 주고받는 선문답은 영원을(이라고 쓰고 내 공부의 결과라고 읽음) 찰나에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제 공부가 이와 같다 보니, 어느 시인의 시집에서 본 모든 결과는 비로소 과정이었다.”를 번번이 확인하면서 유지하고 있습니다.)

 

붓다 고타마 싯다르트의 拈花示衆(염화시중)의 물음에 微笑(미소)로 답한 제자 가섭이 결국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법()을 이은 제자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拈花微笑로 답한 선어는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와 제자 가섭, 나와 너, 단둘 사이에서 상호동시 허락[이해, 수용]할 때에만 생기는 일[]이었습니다. 선어와 선문답은 이렇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좀 더 자세히 할 때 제가 종종 예를 드는 게 허무개그(대화)’입니다. “, ~”라고 하면서, 자극한 나의 의도에 상대가 반응하지 않은 것에 실망하여 다시 내가 원하는 반응을 끌어내려고 추궁하지 않고 상대의 (엉뚱한) 반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3자가 볼 때 허무하게) 끝내는 대화를 저는 선문답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여깁니다. 3자가 볼 때 허무하다고 여긴 것일 뿐, 상호동시에 허락하여 끝낸 두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상호동시에 이해했는지 아닌지는 문답의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저 3자의 궁금함일 뿐입니다.

 

2.

<그렇다면, 과연 제자 가섭의 微笑는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한 拈花示衆의 물음[]에 대한 (올바른) []이었을까요?>

 

()문답은 물음(과 답)(선문으로)해석하고 (선답으로)번역하여 설명[]하는 상호과정[]입니다. 방점은 해석번역에 두었습니다. 해석과 번역은 해석하는 자리[frame]]와 번역하는 자리[tool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리붓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았다(고 전해지)입니다. 이 자리는 내가 앉아 있는 거인의 어깨이면서, 내 공부로 선택한 (자칫 확증편향이 될 수도 있는)믿음이기도 하고, 내 수행이 바라는 지향이기도 합니다. 제 공부에서 이 해석과 번역은 제 공부로 선택한 자리[(생각)]를 쓰는 일[]입니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홍세화의 책, ‘생각의 좌표에서 본 말[물음]입니다. 이 문장을 처음 본 순간 '父母未生前 本來面目(胎於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은?)'이나 是甚麽(이 뭣고?)’祖師西來意(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같은 화두로 들였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專精思惟(전정사유)의 방법[tool]으로 깨달아 확인한 것이 모든 것은 緣起(연기)한다‘12緣起法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비로소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법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선택한 수행의 방법과 공부의 과정에서 깨달음[頓悟]의 전환으로 자리가 달라졌습니다. 이 자리를 바탕으로 한 관점[; 생각]’이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법이라 여깁니다. 제가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부문 중 가장 우선하는 것이 바로 이 [생각; 관점]’과 생각[, ]이 비롯하는 자리입니다.

 

법을 공부하는 수행자들이 공부로 주고받는 말, 이 말이 오고[如來] 가는[如去] 문답 사이에 있는, 행간이 된 붓다의 법을 함의한 말[][如來()]이라 여기고, 시니피에를 함의한 시니피앙과 시니피앙 사이를 이어주는 맥락(Context)이라 여깁니다.

 

3.

그럼 이제, 물으신 선어는 왜 비유가 상냥하지 않고 불친절하고 배배 꼬여있는지에 대하에 제 공부로 답합니다.

 

(切磋)琢磨이고 啐啄(同時)이기 때문입니다.

 

선은 ! 하고 건드리는 자극[물음; 마중물]입니다. 이 자극에 어떻게 반응[대답; 작두샘 퍼 올림]하는지에 따라 다시 탁! 하는 자극(반응)을 줍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 안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라고 한,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생존한 로고테라피의 창시자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출신 신경학자 빅터프랭클(Viktor Emil Frankl)의 공부를 참고합니다.

 

공부[발심]하는 계기가 되도록 憤心(분심)을 일으키는 자극(반응), 다그치고 추궁하면서 궁지로 몰아넣는 자극(반응), 시비 거는 듯 빈정거리거나 조롱하는 반응(자극) 등과 같이 상냥하거나 친절함은 차치하더라도 관점에 따라선 무례하기까지 한 사례들도 있습니다. 대개 친절하거나 상냥하기를 기대하였던 혹은 내가 생각하거나 바랐던 (태도를 포함한)대답[반응]에서 어긋났고 벗어나는 사례가 많습니다.

 

선의 한 부분이 ()이기 때문이고, 내가 생각하거나 바랐던 것을 망상이라고 여기게[깨닫게] 하는 자극이 선[공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한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를 유지하고 깨지지 않게 지키려는 생각을 깨부수자는 것이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깨질 게 없을 때까지 깨()야 본디의 그 자리에 닿습니다. 깨달음[() 닿음]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깨질 것이 없어서 깨지지 않고 깰 수 없는 것을 金剛(금강)’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諸行無常(제행무상), 諸法無我(제법무아), 涅槃寂靜(열반적정) 그리고 一切皆苦(일체개고)

 

출가수행자든 재가수행자든 붓다(고타마 싯다르타)가 이야기한 법을 공부하겠다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걸림 없이 사는 無碍를 선택했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解脫을 지향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붓다의 법을 선택해서 공부하는 선사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걸림 없이 살라고 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상냥하지 않고 불친절하고 배배 꼬인 말을 하는가?

 

제 공부로는 頓悟漸修(혹은 漸悟)에 그 이유가 있다고 여깁니다. 격의(불교)로 붓다의 법을 공부하는 수행자들 사이에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돈오와 점수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육조단경을 꼽습니다.

 

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수요

心如明鏡臺 마음은 명경대라

時時勤拂拭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勿使惹塵埃 티끌이 끼지 않도록 하자!

 

신수의 글[게송]을 읊조리는 수행자의 말을 들은 혜능이 그 말[게송]에 대하여 한 말[게송]이 그것입니다.

 

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디 나무가 아니고

明鏡亦非臺 명경 또한 ()가 아니어서

本來無一物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何處惹塵埃 어디에 티끌이 낄 데가 있겠는가!

 

요즘 같으면 아재개그라고 하거나 말장난 같다고 할 혜능의 이 말[게송]은 염화에 미소를 지음으로써 붓다의 법()을 이은 가섭처럼, 가섭을 이은 (초조)달마를 통해 (5)홍인으로 이어진 붓다의 법이 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글을 쓸 줄도 모르는 혜능에게 이어집니다. 이때부터 붓다의 법은 南宗 頓悟北宗 漸悟로 갈리면서 남돈 북점의 선[]은 사방으로 펼쳐졌고, 임제 의현 선사에 의해 수렴되어 해동으로 이어진 조계(6조 혜능)의 선[]은 일제와 독재의 시절을 거치면서 표면으로는 간화선을 종지로 하는 조계종에 (고여)있는 것처럼 알려져 있습니다.(통시적이고 공시적으로 얼기설기 엮여 있는 매우 복잡한 내력을 몇 문장으로 아주 거칠게 썼습니다.)

 

아무튼, 육조(혜능)의 공부를 따르고 있는 수행자 대부분은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이야기한 법을 선으로 해석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선사들의 선어는 대개 전등록과 1,700 공안, 임제록, 그리고 벽암록의 100칙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말씀마따나 상냥하지 않고 불친절하고 배배 꼬여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 망이)으로 매질을 하거나 느닷없이 버럭 (; 고함)을 하거나 뜬금없고 밑도 끝도 없이 상식밖에 乖角[]을 한다거나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미화해서 말하자면 수행자마다 선택한 가풍과 종풍이 다르고 선 수행을 선택한 수행자마다 선풍이라 여기면서 하는 공부의 흔적들입니다.

 

선어는 1;1 관계의 문답에서 비롯합니다. 물음[자극]의 촉발이 있고 그 물음에 답하는 대응이 있어야 선어가 생깁니다. 마치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처럼요. 위에서 언급했습니다만 묻는 방법이 상냥하지 않거나 불친절하거나 거칠고 무례하고 심지어 폭력적이기도 합니다. 단박에 깨닫자는 돈오의 열망(이라고 썼지만 조급함이거나 어설픔이라고 읽을 수 있음)에서 기인한다고 여깁니다.

 

제 공부에선 물음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에게 알려주기 위한 물음이고, 둘째는 내가 아는 것을 상대가 아는지 모르는지 떠보거나 견주기 위한 물음이고, 셋째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상대에게 묻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묻음에 대답하는 것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은 알려주는 것이라 하고, 물음에 답하고 그 답에 대해 다시 묻고 다시 물은 것에 대해 다시 답하면서 꼬리 무는 것처럼(상호동시 허락하지 않으면 자칫 말꼬리 잡는다고 하는 경우 있음 주의) 여러 번 묻고 답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가르고 쳐주는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알려주는 것은 상대의 물음에 내가 한(이라고 쓰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준 것이라고 읽기도 함) 대답을 상대가 이해하였는지 확인하기 위해 묻고 상대의 대답에 따라 과정을 한두 번 더 거치지 않는 것인데 비해서, ‘가르쳐주는 것은 상대가 알게 해주는 것이기도 해서 내가 알려준 대답을 상대가 이해하였는지 확인하는 물음을 거듭하면서 상대의 답이 내가 알려준 것에 이를 때까지 계속 문답을 이어가는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흔히들 척 보면 모르겠냐하면서 한눈에 알아보라고 하고, ‘쿵 하면 담 너머 호박 떨어지는 소리인지 알아야 한다라고 하는데요, 저는 겪어 봐도 모르는 게 있고, 담 넘어가서 직접 보기 전에는 모르겠습니다.

 

물음이 없이 답을 말하고 상대의 그 답에 대하여 어떻게 그 답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답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혹은 그 답에 대해 내가 이해한 것은 이러이러한데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물어서 확인하지 않고 서로 내 답만 하다 보면 결국 답답한 상황이 생깁니다. 상대의 물음에 올바른(이라고 쓰고 상대가 바라는 것이라고 읽음) 대답을 하려면 물음을 이해하기 위한 물음을 하고 답을 들어야 하는데, 묻고 답하는 과정 없이 답을 말하고 그 대답에 다시 답을 하고 또 답을 하면 그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중용 20장에서 말하는 博學(박학), 審問(심문), 愼思(신사), 明辯(명변), 篤行(독행)般若(반야)五悳(오덕)[般若五悳]으로 들여 제 공부의 방법으로 삼고 있습니다. 박학[자극; 마중물]을 경청과 수용으로 (해석)하여 심문(신사, 명변, 독행)의 과정을 통해 신사, 명변, 독행(은 상대에게 박학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음)으로 반응합니다.

 

4.

수백 년 동안 암송과 구전(如是我聞)으로 이어진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말[묻고자 한 바와 답하고자 한 바를 한 말, ]들을 결집한 것이 경[]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구마라집이 번역한)金剛經(금강경)을 최초의 선어록으로 여기고 있고, 금강경 중 如是我聞(여시아문)於意云何(어의운하)를 불법을 공부하는 불교의 키워드로 꼽고 있습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於意云何, (너는) 어찌 생각하는가?

 

5.

, 선어, 선어록 등에 대해서 살폈던 때가 있었습니다. 뒤져보니 흔적 몇 개 있어서 그 가운데 하나를 옮겨봅니다.

 

가르침의 교육과 가리킴의 공부(20066월 기록)

 

불교의 가르침과 불법의 가리킴은 양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면인 뫼비우스의 띠 같고, “道不遠人 人遠道(도불원인 인원도), 山不離俗 俗離山(산불리속 속리산)”이라고 한 것처럼 등을 맞대고 앉아서 마을을 등지고 산(을 등지고 마을을 향하고 있는 대웅전 부처님)을 향하는 수행자와 산을 등지고 마을로 향하는 수행자의 뒷모습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尋牛(심우)360도가 入廛垂手(입전수수)0도임을 보여주는 화순 운주사에 있는 石造佛龕 雙背佛(석조불감 쌍배불)의 가르침과 가리킴은 두께 없이 투명한 양면과 같다.

 

雙遮雙照(쌍차쌍조)는 서로 차단하고 서로 비추면서 서로 가리킴의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솔직한 탁마 공부이다.

 

어떤 이의 가리킴을 가르침으로 회향하는 것이 불교의 교육이고,

어떤 이의 가르침을 가리킴으로 회향하는 것은 불법의 공부이다.

 

불법을 교육할 수 있을까?

 

敎育이라는 것이 가르치고 기른다는 뜻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교육은 한마디로 습업을 가르고, 치고, 길러낸다는 뜻이겠다. 습업이 무엇인가? 이미(서로) 그리하기로 한 그것이다. 말과 제도, 문화, 관습 뭐 그러한 것들이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하는 저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습업이다. 그러나 이미 그리하기로 한 그것을 나와 당신은 그리하자고 동의한 적도 없고, 그리하라고 허락한 바 없다. 그렇지만 저자거리의 습칙(習則)은 나와 당신의 허락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촘촘한 습칙의 관계망으로 나와 당신을 에두르고 있다. 이렇게 저자의 습칙에 촘촘히 에둘린 나와 당신은 저자의 습칙이 가르치는 것에 어떠한 반응함도 없이 그 습칙대로 길들어간다. 결국, 나와 나들은 저자의 습칙을 가르치는 습칙전도사가 되어 또 다른 습칙전도사를 길러 내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다.

 

어떤 이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하였던가? ‘그것이 선지식이다. ‘어떤 이가 아니라 그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하였던, 어떤 이의 가르침이 선지식이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의 가리킴이 선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그 자가 선지식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리킨 그 행간이 함의한 것이 선지식이라는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무리 많다 해도 가리켜진 달은 하나이다. 달을 가리키는 것[과정, 수단]이 손가락이 아니고 똥 막대기라고 해도 가리켜진 것은 달이다. 달을 가리키는 것[방법, 형식]이 손가락이 아니고 내미는 차 한 잔이라고 해도 가리켜진 것은 달이다. 달을 가리키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후려치는 몽둥이질이라고 해도 가리켜진 것은 달이다. 달을 가리키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느닷없이 질러대는 고함이라고 해도 가리켜진 것은 달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달이 천개의 강에 두루 비추는 것처럼, 하나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질인 것이다.

 

눈 부릅뜨고 앞을 잘 지켜서, 저자의 습칙이 가르치는 것에 속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고, 간택을 잘 하면, 습칙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습칙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볼 줄 알게 된다. 그렇게 저자의 모든 습칙은 본래 스스로가 달을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확연히 알게 되는 것이 자각이다. 그러나 습칙전도사들마다 나름대로 이 자각에 이르는 공식과 방법을 가르치므로 이로 인하여 자각에 이른다는 공식과 방법은 부지기수로 많아졌다.

 

그렇게 가리킴의 자각에는 이르러 보지도 못한 채 가르침의 습칙으로만 길들여진 습칙전도사들은 가리킴의 공부보다는 여전히 저자거리의 습칙을 가르치는 교육만을 하고 있다.

 

어쩌랴!

이것 또한 저자거리의 습칙인 것을!

 

이렇다보니

불교는 교육으로 전해지고

불법은 교외별전으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격외구가 교외별전인 것은 아니다.

언외언도 교외별전인 것이 아니다.

 

교외별전과 격외구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격외구나 언외언의 선어록은 교육용 교재일 따름이다.

교외별전의 법은 경구나 선어록에 있지 않다.

 

6.

쓰고 보니, 몇 줄로 답해도 될 물음이었는데 중언부언 길게 썼습니다. 상냥하고 친절하게 답하고 싶었나 봅니다. 종풍이나 가풍과 무관하게 제 성향[業習]과 지향하는 공부는 이와 같습니다.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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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는 "불복종(하려는 생각)"에 반대한다.'

왜?
"불복종"한다고,
"불복종" 하겠다고 할까?

왜?
스스로를 "복종"하는 자로 선언 하는가?

그것도 당당하게...

"불복종"

이 말은 어디에 닿기를 바라는가?
이 말이 나오는 자리는 어디일까?
이 말은 어떻게 자리잡게 됐을까?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홍세화 선생님이 <생각의 좌표>에서 한 말이다.

말이 나온 자리와
말이 닿을 자리를 살피지 않고 하는
"불복종"은
그동안
"복종"하였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말이(된)다.
지금도
"복종"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말이(된)다.
앞으로도
"복종"할 것임을 선언하는 말이(된)다.

그래서 나는
"복종"의 틀에서 떠나[離]지 않으려는
"복종"의 틀이 틀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은
"복종"의 틀이 심지어 옳은 것이라 유지하려는
"복종"을 당연한 프레임[틀]으로 여기고 있음을 전제로 선언하는
"불복종(하려는 생각)"에 반대한다.

뽑아 내야할 관습[생각]의 뿌리와
뻗어 가야할 사유[생각]의 뿌리를 살핀다.

온날 문화탁발행선의 만인불사는 "불복종(의 '생각')"을 화두(話頭)로 들게 한 염두(念頭)를 보면서 그 생각의 뿌리[念根]을 살피는 일[念念告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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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카테고리 없음 2015. 11. 6. 07:15

시계[時計-示界] 움직이지 않는 시계[틀] 안에서 움직이는 시계바늘[念]을 봤다. 움직이는 시간[念]을 움직이지 않는 사진[틀]에 담아 바라본다. 시계는 시간[念]을 보기위한 틀[구조, 말-글]이고, 시간[念]은 시계[틀]를 떠나(있)는 생각[지향]이다. 시계는 흐릿해도 지금은 선명하다. 멈춰진 시간은 흐르는 지금이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여기는 또렷한데 저기는 모호하다. 천강월(千江月)처럼 흔적이 지향인 모든 흔적은 그렇다. 돌이켜보니, 時時示市人[念念告天]이다 선명하게 움직였던 거기의 지금은 지금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 시계의 흔적으로 확연하다. 온날 문화탁발행선@Paris의 만인불사에서 바라본 시계는 시간[달-생각]을 보라고 가리키는 두께없이 투명한 양면의 손가락[나침반-바늘]이었다. 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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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카테고리 없음 2015. 9. 18. 10:10

만남


건축가 승효상 선생님을 만났다.
수행순례자의 집[Guest Temple], 만인불사 설계를 부탁하려고 마음에 품고 있는 분이다.

어려서부터 '집'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북공고 토목과를 다녔는데 토목과 건축이 다르다는 걸 그때 알았다.
치산치수[治山治水]로 사람이 사는 터를 다지는 토목과 그 터에서 사람이 사는 공간인 집을 만드는 건축.
문화불사를 서원하고 마을도량에서 문화탁발행선을 하는 것도 이 토목, 건축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사람이 살 수 있는 터를 다지는 일, 그 터에 집을 짓고 사는 일.

유형의 토목과 건축
무형의 관습과 습관

관습의 바탕에서 태어난 습관은 관습의 틀이 되고, 이 습관의 틀은 다시 관습의 바탕이 된다.
문화불사는 딛고 있는 바탕과 두르고 있는 틀을 살피는 일이다.

거칠게 한마디로 하자면 '생각[念]'을 하는 일이고, '생각[念]'을 쓰는 일이다.
고타마 붓다의 법을 잇는 혼속조사의 가르침 중 내가 수행의 지향으로 삼고 있는 것이 있다.
'생각'으로 '생각하는 생각'을 살펴서 '생각을 없애는 일'로 '생각을 쓰는 일'[念念告天]이다.

[念念告天]은 바탕과 틀을 보는 생각이고 바탕과 틀을 깨는 일이다.

그제 저녁,
쿤스트라운지에서 태중에 다섯달 된 오복이를 품고 있는 여왕벌을 만났다
여왕벌은 전남일보 기자인데 처음 인연한 계기가 다문화관련한 기사 때문이었다. 그 뒤로 한결 같이 인연하고 있다. 이 여왕벌이 어느새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품고 있다. 참 아름다운 여자사람이다. 그제도 여느 때처럼 만나서 일상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공부를 하다가 오랜만에 만난 쿤스트라운지 쥔장과 육아에 대한 이야기로 흐른다. 한국사회의 선명한 단면이다.
육아에 대해선 문외한인 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 쿤스트라운지 쥔장 정유진 선생님은 다문화가정이다. 육아를 위해 아이를 대하는 부부의 규칙을 정했다는 말을 반갑게 배웠다. 아이에 대한 믿음과 육아에 대한 확신이 있다. 아이가 자기 삶의 주체로서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모가 할 일을 분명하게 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데 아죽 낯익은 얼굴이 쿤스트라운지에 들어온다.
건축가 승효상 선생님이다.
일어나서 인사를 할까하다가 말았다.

셋이 한참을 더 이야기를 나누는데 승효상 선생님이 자리를 옮기느라 움직일 때 정유진 선생님이 알아보고 인사를 나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나도 인사를 건냈다.

"꼭 한 번 찾아가서 만나보고 싶었"고
"만나면 부탁할 게 있다"고 하면서
"이따 명함을 받아가고 싶다"고
"사진도 찍자"고 하였다.
흔쾌히 그러자신다.

여왕벌과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나서면서
승효상 선생님과 사진을 찍고 명함을 받았다.
만인불사 설계를 해달라고 부탁하러 갈 일을 생각하니 설렌다.

밖으로 나와 헤어지는 인사를 할때, 여왕벌이 조심스럽게 접힌 봉투를 내민다.

영화 '선생 김봉두'를 보면서 마음이 담긴 촌지와 이끗을 노리는 뇌물의 차이를 구분했다.
보란듯이 테이블 위에 올려 놓는 빳빳한 하얀봉투와 슬그머니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는 꼬깃꾸깃한 주름 속에 숨긴 마음이 그것이다.
받는 사람을 궁색하게 하면서 주는 것과
주는 마음이 아름다워 감사히 받는 것은
꼬깃꾸깃 접힌 주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쿤스트라운지는 아시아문화전당 옆 소통의 오두막이 있는 곳에 있다.
소통의 오두막은 광주를 두르고 있는 10개의 어번폴리 중 하나이다. 승효상 선생님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소통의 오두막 옆 쿤스트라운지에서 승효상 선생님을 만난 게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만인불사는
만 人佛이 하는 일[事]이고
만 人佛이 머무는 집[舍]이다.
그래서 수행순례자의 집[Guest Temple]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인불사'는 켜켜의 주름처럼 여러 뜻을 담아 겹치게 지은 이름이다.

온날 문화탁발행선의 만인불사는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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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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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積북적

카테고리 없음 2015. 9. 16. 10:29

Book積북적


책이 왔다.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한자어 이야기>
<종교란 무엇인가>

어제 아침에 김병욱 선생님 전화를 받았다.
장흥우체국에서 우편물을 배달하는 일을 하는 분이다.
등기우편물이 있단다. 해름참에 우체국에 가서 받겠다고 했다.
문화탁발행선을 한답시고 법단을 비우고 다니는 줄 아는 김병욱 선생님은 우편물이 오면 미리 전화를 해서 내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는것이다. 김병욱 선생님은 손바닥도량[SNS-카스] 도반이다.

"문화당입니다 주문하신 책 왔습니다 시간나시면 들리세요"
문화당 당주님이 보낸 문자메시지다.

지난 화요일에는 사월의책 대표 안희곤 선생님이 자랑한 '종교란 무엇인가'를 주문했고,
수요일에는 홍승직 선생님이 쓴 '한자어이야기'를 주문했고,
그리고 토요일에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를 구해달라고 했다.
손바닥도량에서 인연한 분들과 관련한 책이다.

장흥청소년수련관 운영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느라 해름참에 장흥에 닿았다. 우체국으로 가는 길에 전화를 했더니 김병욱 선생님이 봉투하나를 들고 행길까지 나왔다. 싸인을 하고 등기우편물을 받았다. 짐작했던대로다.
김재욱 선생님이 보낸 책이다.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과분하지만 고마운 인사말과 저자 싸인이 된 책이다.
김재욱 선생님이 책을 보내주시겠다고 주소를 물으실 때, 이미 문화당에 주문한 책은 다른분께 선물하기로하고 받겠다고했다.

"외줄타기 솜씨가 절묘하"고 "아슬아슬 균형을 잡"는 "맛깔스러운 이야기"가 있다고
"소곤소곤 말을"하신 송혁기 선생님의 추천사가 다른 세 분의 글보다 반갑다.

김재욱 선생님은 손바닥도량에서만 인연하고 아직 발바닥도량에서는 뵙지 못했다.
자판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채권을 가지고 있으니 이 가을에 만나면 좋겠다.

문화당에 책을 주문을 하면 보통 일주일은 기다려야 책을 받을 수 있다.
느리지만 답답하지 않다.
흑석동 살 때 다녔던 청맥서점에서도 그랬다. 교보문고에서 책을 고르고 청맥에 주문했다.
'보고싶은 책 그러나 구하기 어려운 책, 청맥에 주문하시면 다음날 받아볼 수 있습니다.'
청맥서점의 광고문구는 지금도 기억한다.
(청맥서점을 떠올리니 손바닥도량에서 다시만난 성백술 선생님이 생각난다. 성백술 선생님 그렇지요? ^^)

책 욕심이 많아서 당장 보지 않더라도 일단 쌓아둔다.

장흥청소년수련관 운영위원회를 마치고 70년 된 마을서점, 문화당으로 갔다.
책 세 권 받았다. 50,000원을 드렸는데 당주님이 주섬주섬 13,000원을 거슬러 준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뒤풀이 장소로 가느라 우선 받고 나섰다.
나중에 찬찬히 셈을 해보니... 평소보다 더 할인을 해 준 것이다.

누구라도 이 가을에 <한시에 마음을 베이>고 싶은 분은 말씀하시라.
70년 된 마을서점 문화당에 주문해서 산 <한신에 마음을 베이다>를 저자 싸인을 받아서 보내드리겠다.
이 핑계로 김재욱 선생님을 함 뵈어야겠다.

홍승직 선생님의 <한자어이야기>
젊은 사람들이 곁에 두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어휘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빠르게 넘기다가 눈에 띄는 쪽을 보니 으레 쓰던 말인데 '아 이런 뜻이 있었구나'하는 단어가 몇 개 있다.
예컨대, '즐비(하다)' 순 우리말인줄 알고 썼는데 알고보니 한자어였던 것이다.

사월의책 대표 안희곤 선생님은 세상사 무거운 주제도 가볍게 다루시던데 이번 책도 역시 그랬다.
<종교란 무엇인가>
책 제목만으로도 무겁다.
그런데 막상 책을 받아들고보니 아주 가볍다. 두꺼운 양장본으로 만들었는데도 그렇다.
안희곤 선생님, 책 무게를 정하는 것도 출판전략인가요?

가을이다.
만인불사에 책이 쌓인다. 인연이 쌓인다.

온날 문화탁발행선의 만인불사는 Book積북적한 인연을 잇고 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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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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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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