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如來 與 如去여거

“모든 새싹이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마음을 주는 사람을 향해 저리 기울어지는 것”이니

<사람이 온다>를 기다린 것은

“들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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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5권 도착”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고 문화당에서 보낸 문자메시지를 본 게 지난 달 14일이었으니 달포도 더 전이다. 책을 주문할 때의 기쁨과 받을 때의 즐거움만한 게 또 있을까. 어제서야 문화당에 가서 책 5권 받았다.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적금을 찾는 느낌도 이럴까?

그리고 <인간의 악에게 묻는다(김성규, 책이라는 신화)>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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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칙하고 암울한 장면을 보고 견뎌야 하는 인내심이 필요한 시간이" 더 이상 필요 없을 “‘사회권 선진국’을 향해,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 여래처럼 왔다.

책책책책 책을 쌓았다. 오층책탑이다. 쌓아 놓은 책을 보는데 책 표지가 거울처럼 보였다. 그 거울에 비친 책표지가 허세 그리고 허영의 페르소나 그리고 임포스터로 보였다. “가불”한 ‘나’를 본 것이다. 가불은 빚이다. 빛을 (내)보겠다고 빚을 낸 것이다. 빚이 빛을 가리고 있다. 빚을 갚으면 그리고 빚에서 벗어나면 ‘나’의 본래모습이 나타날까? ‘나’는 본래모습을 볼 수는 있기나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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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etre)’라는 동사를 부여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다’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 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서론: 리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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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물리학 그리고 양자역학 그리고 뇌과학 그리고 인지심리학 등에 관심에 짙어지고 있다. 김상욱 그리고 김대식 그리고 정재승 그리고  장동선 그리고 김경일 그리고 …… 그리고 …… 헤겔 그리고 들뢰즈 그리고 동학을 유튜브에서 그리고 줌에서 마치 백고좌 법회를 하는 것처럼 공부하고 있다.

1979년 겨울, 흑석동 용두봉 인덕법단 참선방에서 느낀 그리고 정한 ‘두께 없이 투명한 양면’ 같은 ‘繼開의 한 점’으로 수렴하(려)는 그리고 발산하(려)는 공부를 하고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부분이 없는 것”이라는 ‘이 점’은 내 사유의 바탕이 된 뒤로 단 한순간도 변한 적이 없고 없어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뉴턴의 아틀리에-물리학의 눈으로 본 미술’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점과 선을 이해한다면 그림 속의 수학과 과학, 더 나아가 인간의 본질까지도 읽을 수 있다.”고 한 김상욱 교수의 말을 반갑게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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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간 것은 호기심이었다. 오지랖인 줄 알았는데 번번이 오지랖의 탈을 쓴 날카로운 호기심이(되)었다. 사북선처럼, 그물처럼 넓게 퍼지는 호기심인줄 알았던 그 호기심은 끝이 뾰족했다. 탱자나무 가시처럼 날카로웠던 이 호기심의 끝은 번번이 부메랑처럼 나를 찔렀다.

그래도 다시 사람에게 간다. “방문객”처럼 오는 사람을 기다리면서 사람들이 사는 俗에서 사람스럽게 사는 사람들 俗으로 간다.

‘사람’은 선(하기도)하지만 페르소나 그리고 임포스터의 “인간(人間)은 악이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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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주

카테고리 없음 2022. 1. 31. 17:14

공양주

처음 만든 음식은 라면이었다. 그리고 김치찌개. 냄비밥도 지어봤고, 달걀후라이도 만들어서 상을 차렸다. 홍은동 쌍둥이네 셋방 살 때다. 그때는 연탄불로 했다.

79년에 서대문중학교 입학하고 몇 달 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다음해 경기상고에 입학한 형 학교 다니기 좋도록 통인동으로 이사했다. 집주인은 양복점을 했는데 길가 전방처럼 양복점이 있었고, 양복점 문과 나란히 셋방 출입문이 있었다. 문 열면 바로 부엌이고 왼쪽으로 방으로 들어가는 미닫이 문이 있는 부엌이 딸린 단칸방이었다. 변소는 밖에 따로 있었다. 세운상가 맞은편에 있던 공작고전의상실에서 한복 바느질을 하셨던 황모님은 이틀이 멀다고 밤새워 일을 하시기 일쑤여서 부엌 살림은 대개 내가 했다. 가지볶음 반찬은 통인동 살 때 처음으로 했다. 그땐 석유곤로에 후라이판 올려놓고 했었다. 그래서인지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오뎅볶음 반찬이 하나 더 늘었다.

두 해 그렇게 살다 흑석동 인덕법단에서 사신출가 생활을 했으니 부엌 살림하곤 거리가 멀었다. 시내버스 노동자로 지낼 때 자취를 했지만 국 끓여 먹는 정도였지 따로 반찬을 만들어 먹거나 요리를 해먹지는 않았다. 무생채를 버무려서 두고 먹는 게 다였다. 그래서 지금도 무생채는 곧잘한다. 쨌든 식욕은 왕성했어도 뭘 먹고싶은 게 있다거나 하지 않아서 성가신 건 없었다. 그저 허기만 가시면 그만이었다.

조금전에 불쑥 뭔 요리?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김말이튀김을 만들어 보려고 상상을 하면서 마트에 가서 재료를 준비했다. 라이스페이퍼에 김을 올려놓고 그 위에 잡채를 얹어서 돌돌 만 다음에 후라이팬이 볶듯이 튀겨볼 요량이었다.

잡채는 대충 만들었다. 적은 것 같아서 조금 더 했는데 막상 만들면서 보니 처음에 준비한 것도 많았다. 맛을 봤더니 간은 좋았다. 깻잎을 넣어서 향도 괜찮고. 이제 잘 말면 될 일이다.

역시 어설펐다. 처음엔 꽝. 다시 또 꽝. 엉성하다. 자꾸 엉성하다. 사각으로 된 라이스페이퍼인데 처음에 반듯이 놓고 했더니 옆으로 삐져나오는 잡채가 수습이 안 됐다. 다섯 번의 엉성함 끝에 모로 놓고 했더니 딱이다! 그때부터 모양이 제법 나왔다. 준비한 김은 4장이었다. 4등 분을 하면 16개를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 만들고 보니 15개다. 한 개가 어디로 사라졌지? 잡채가 많이 남아서 하나는 김 없이 바로 말아봤다. 얼추 괜찮게 보인다. 영 똥손은 아닌 것 같다.

말아 놓은 말이를 조금 마르게 뒀다가 후라이판에 기름을 두껍게 두르고 튀기듯 부치듯 집개로 뒤집어가면서 고르게 튀겨지도록 했다.

남은 잡채도 후라이판에 넣고 볶았다. 뜨거울 때 바로 먹으니 맛이 겁나 좋다.

처음 한 김말이튀김이다. 공양주 흉내라도 낼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랑 먹을까?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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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일

카테고리 없음 2022. 1. 31. 08:59

옛일

두 달이 지난 것 같다. 그 사이 통화는 서너 번 했을까? 이틀 전에 전화를 드려서 간다고 말씀을 드렸고 자응서 나서면서 전화를 드렸다. 12시 반쯤 됐을 것이다. 한 시간 남짓 걸릴 거라고. 싸목싸목 천천히 가겠다고 하고, 가서 점심 공양 할 거라고 말씀드렸다.

명절 연휴는 달력에서만 있는 빨간색일 뿐, 길은 평소처럼 한가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제한 속도를 넘지 않으면서 안거를 정속으로 다뤘다. 콩앱을 열고 안거에 연결했다. 생클을 듣는데 익숙한 곡들이 흘렀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가 교도소장 방에서 모차르트의 음반 피가로의 결혼을 발견하고 꺼내서 레코드판 먼저를 털어내 턴테이블에 올리고는 잠깐 음악을 듣다가 이내 문을 잠근 다음에 마이크를 켜서 스피커에서 나오는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 – 편지의 2중창’을 확성기를 통해 쇼생크 마당에 퍼지게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드러누운 것처럼 편하게 의자에 안거 팔베개를 한 채 음악을 듣는 앤디는 교도소장이 문을 깨고 들어와 끌어낼 때까지 쇼생크의 모두가 자유를 느낄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안거 스피커 볼륨을 끝까지 높이고 안거 창문을 내렸다.

졸음에 겨워 함평휴게소에 안거를 멈추고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평소 1시간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쉬엄쉬엄 2시간 걸려 황모님을 뵀다.
남은 이가 몇 개 안 돼서 사과를 조각조각 콩만하게 잘라서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우물우물 하고 계셨는데 그나마 넘기지를 못하고 뱉어 내신다.

여느 때 같았으면 넓은 냄비에 찌개를 새로 끓여놓고 밥도 새로 지어놓고 계셨을 텐데... 뭐가 없다고 라면 끓여서 밥 말아 먹을 거냐고 하신다. 몸을 무겁게 일으키시면 부엌으로 가시는 황모님 뒤를 따랐다.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가 있어서 뚜껑을 열어보니 한 대접 정도 남은 미역국 끓여 놓은 게 있었다. 뜨거운 물 한 대접 더 붓고 라면(오신 채 안 들어간 ‘채식청정면’) 한 개 끓였다. 늘 해주시던 황모님이 고창에서 부엌(불)을 허락해주신 건 처음이다. 식은밥이라도 먹을 거냐고 하셔서 밥솥을 열어봤다. 아침에 한 것처럼 보이는 보온밥솥의 밥에서 미지근한 김이 희미하게 올라왔다. 조금 덜어진 걸 보니 한 주걱정도 드셨나보다. 몇 번의 전화 통화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하신다. 처음 듣는 것처럼 황모님 말씀을 봄동 겉절이 반찬인양 삼아 미역국라면 한 대접에 밥 두 주걱 말아서 점심공양을 했다.

공양을 하고 나니 속바지 안주머니에서 쌈지를 꺼내시더니 두 번 접힌 지폐 뭉치를 꺼내신다. 오만 원짜리 한 장, 만 원짜리 한 장, 천 원짜리 몇 장이 삼등분으로 접힌 지폐뭉치다. 천 원짜리만 남기고 지폐 두 장 펴서 주신다. 천 원짜리 지폐를 천천히 세시더니 칠천 원이나 남았다고 웃으시면서 다시 그대로 두 번 접어서 쌈지에 넣고 속바지 안주머니에 넣으신다.

기묘(己卯)생, 올해로 여든넷을 사시는 황모님. 겨워 보이신다. 옛일은 가고 새일이 오는 것이 한 생이라지만, 점점 고요해지는 한 생을 보는 내 연민이 가엽다.

배웅하시겠다고 느릿느릿 나오시는 황모님을 기다리는데 문 옆 더미 위에 둔 호미며 장갑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텃밭 둘레가 참 가지런하다. 햇살이 좋아서 사진을 찍었다. 이 순간.

태어난 불갑 선들을 지나가고 싶었다. 가는 길에 영광 외갓집을 들렸다. 대목수를 하셨던 외할아지가 직접 지으신 집이란다. 아직도 여전한 외갓집 대문과 뒤안 우물을 보니 50년 전 예닐곱 살 때 기억이 떠오른다. 두 살 터울 형과 황모님 혼례 치르는 날 태어났다는 네 살 많은 막내 외삼촌과 지냈던 외갓집이다. 공작새도 키웠던 정원이 참 예쁜 외갓집이었다. 10남매 맏이인 황모임은 아홉 동생들 중 셋은 먼저 보내고 여섯이 남았다.

국민학교 다닐 때 방학이면 큰집에서 며칠 외갓집에서 며칠을 지냈다. 황모님이 여름엔 모기가 많다고 안 보내셨고 주로 겨울에만 보내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여름에 갔던 기억도 제법 있다. 내가 태어난 자리는 선들 뒤 ‘후동’이라는데 ‘불갑면 녹산리 456번지’가 내 본적지다. 지금은 사촌 누이가 하는 ‘덕산가든’ 간판이 걸린 선들 큰집은 불갑저수지 아랫마을이다. ‘선돌이 있는 들’이라고 해서 선들이라고 하는 것 같다.

냇가에서 놀면서 잡은 송사리 몇마리를 고무신 벗어 그 안에 담아서 큰엄마한테 갖다드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는 깊지 않았다. 키가 작은 어린 내 무릎이 잠길 정도였다. 겨울엔 내가 얼었는데, 얼음에 구멍을 숭숭 뚫고 얼음판을 발로 쿵쿵 밟으면 그 구멍으로 송사리가 뿅 올라왔다. 뚝방에 불을 놓고 그 불에 송사리를 던져서 굽기도 했다. 열 살 무렵 그렇게 놀았다. 겨울밤이면 외양간 옆 사랑방에 그야말로 옹기종기 모여서 고구마를 깎아 먹었고, 당숙모가 하는 전방에서 사탕이며 과자를 사다 먹으면서 민화투 놀이도 했다. 마주앉아 이불 속에 발을 넣고 다리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다 하나씩 빼는 놀이도 했다. 볏짚 잘라서 김 푹푹 나도록 소죽도 쒀 봤고 밤새 먹은 고구마껍질하고 쌀겨를 물에 섞어서 돼지여물도 줘봤다. 큰집에 대한 기억 중에 선명한 것들이다. 그때 ‘오째’라고 불렀던 또래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문득, 어쩌다 이렇게 반세기 전 옛일을 기억하고 겨우겨우 더듬더듬 떠올리고 있는 내가 잠깐 슬펐다. 섣달 그믐이라 그렇다.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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