素心(소심)

카테고리 없음 2022. 12. 18. 09:19

素心(소심)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俗에서
파아란 하늘보며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俗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

바탕[素心]을 본 아침이다.

고스란히 드러났고
여실하게 나타났다

흔적이야 잠깐 덮여있지만
흔적은 지워지지는 않는다

"흔적이 지향이었다"
는 말을 말 앞에 던졌기 때문이다
흔적이 바탕을 덮었다
결국 흔적이 바탕이었다.

나를 덮고 있는 것[蘊(온)]들
내가 끌어서 덮어 쓰고 있는 것[業(업)]들
드러난 흔적 잘 쓰는 일은
덮여 있는 바탕을 꺼내 쓰는 일이다.

#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나는 나의 기도로/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보다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라는
시인이 위로하는 따뜻한 슬픔의 기도를 끌어와 덮는다

"내 팔 내 흔들어 네 팔 내 흔드는 일"
素心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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祝詩(축시) / 류근


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지길 바랍니다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밝혀 사랑한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나간 날들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자기 연민의 도구로 쓰여지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아니길 바랍니다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빈자리를 확인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의 부재가 위안이 되는 삶이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의 손을 놓아준 힘만큼
당신도 누군가의 손을 가장 큰 힘으로 잡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노래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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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

카테고리 없음 2022. 8. 21. 09:08

평화담, 평화꽃못

이틀 뒤면 처서다. 벌써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 길턱이 느껴진다.

근 십여 년 동안 지냰 여름이 다 그랬지만, 올 여름 더위는 정말 지루했다. '지루하다'고 하지 않고 "지루했다"고 한 것은 체감하는 여름은 끝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막 시원하다거나 덥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감지할 정도의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정도다. 한 낮 두어시간은 여전히 덥다.

여튼, 벌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올 여름은 끈적임과 후텁함이 꽤나 두터웠다. 사나흘 전부터는 밤 공기가 달라졌음을 체감하고 있다. 한밤과 새벽 잠자리에서는 뒤척일 때 다리로 감고 있던 이불을 손으로 더듬어 끌어 당겨 어깨를 덮기 시작했다.

아침에 인나서 꾸물꾸물 해찰하다 안거에 안거 평화로 향했다. 뚤레뚤레 중앙로를 뚫고 군민회관오거리를 건너 한들을 지나면 나타나는 평화마을 입구에선 안거를 한비짝에 머끈다. 안거에서 인나 메타세쿼이아가 낸 짧고 지픈 질 앞에 서서 질 끝을 바라본다. 잠시 우두커니. 짧은데 깊은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밝은데 아득하다. 끝이 밝고 또렷한 '玄'으로 보인다. 가자. 그 끝으로.

꽃길 지나니 꽃밭이다. 아니지 밭이 아니라 꽃못이다.

아, 오늘 보니, 평화마을 송백정가 배롱나무는 물 속에서 꽃을 피우고 물 밖에서 꽃잎을 한번 더 피워내는구나!

그래, 이름을 지어서 부르자. 지금부터 여기는 평화꽃못, 평화담이다.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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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辦托鉢삼판탁발

악양 평사리문학관에서 ‘기후위기 시대에 읽는 박경리 의 시’를 주제로 법회를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평소 관심을 두고 있는 내용인데다 궁금하던 선지식(오민석 교수님)이 주제발표를 하는 법회라고 해서 안거에 안거 안거하는 탁발행선에 나섰다. 이른바 삼판탁발이다.

이판과 사판의 가운데 안에 삼판이 있고, 그 밖에 오판이 있다. 삼판은 이판도 아니고 사판도 아니지만 이판이면서 사판인 것이 삼판이다. 이판과 사판의 판은 ‘가르고 판단하는 판判’을 쓰는데, 삼판의 판은 ‘힘쓸 판辦’을 쓴다. 오판은 悟辦오판이다. 삼판과 오판은 입전수수의 선택에서 비롯한다.

(뜻은 참판, 읽을 땐 삼판으로 하는)參辦삼판은 참견하고 간섭[지배, 소유]하는 뜻으로 쓰는 간여(干與)를 말하는 게 아니라 참여하고 관계[연대, 공유]하는 뜻으로 쓰이는 관여(關與)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삼판수행은 깜냥껏 관계하고, 힘껏 참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삼판탁발은 사람스러운 사람들이 사는 俗에서 하는 것이다. 비록, 관계에서 비롯한 주관의 판단을 일방으로 적용해서 쓰는 것이 사람스럽다는 말이지만 그래도 쓴다. 내가 지향하는 삶이니까.

서두가 장황했다.

궁금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읽는 박경리의 시”라니. 토지도 드라마를 통해서 대강만 알고 있을 뿐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그러니 박경리 선생님이 ‘토지’말고 ‘시’를 남겼다는 것도 시집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호기심 많고 오지랖 넓다고 하지만 정작 모르는 것 투성이다. 시집 <우리들의 시간>과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두 권 주문했다. 5부 25편으로 완결됐다는 ‘토지’도 읽어봐야겠다. 빌려서 읽든 사서 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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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기 어려울 때 시는 위안이었다.”고 한 <못 떠나는 배> 서문의 첫 문장을 시작으로 한 오민석 선생님의 법문은 마지막까지 아름다웠다.

그대는 사랑의 記憶(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時間(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天刑(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肉體(육체)를 去勢(거세)당하고
人生(인생)을 去勢(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眞實(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박경리의 시 <사마천>을 마치 “정구업진언(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처럼 읽고 법문을 시작하는 것 같다.

“진실”의 기록을 위해 몸과 삶이 거세 당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던,
사마천의 “글쓰기의 길”을 메타포로 한 박경리가 생각하는 진리란 무엇일까.

법문의 핵심은 “參與(참여)”였다.
법문의 내용은 “세계를 대하는 박경리의 시적 격자poetic grid”이고 “그것(시적 격자)에 포착된 세계의 풍경들”이라는 것이다.

첫째 참여는, “‘악을 녹이는 독’으로 악에 대한 승리를 지향”하는 것이고,
둘째 참여는, “‘청풍 부르는 소리’로 문명을 넘어서 문명 혹은 문명 이전의 자연을 호명해내야”하는 것이고,
셋째 참여는, “‘사랑’, ‘눈물’을 전제로 대상에 대한 통감과 애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넷째 참여는, “그 무엇보다도 ‘생명 / 다독거리는 손길’로 생명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문을 듣고 나니 단순하고 명쾌해졌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악은 물리치고
선을 지어가기

불쑥, “앙가주망engagement”이, 어떤 ‘사람’이 떠오른다. 스스로 ‘악을 녹이는 독’이 된 앙가주망, 조국 전 법무부장관과 그 가족의 삶에 한없는 통감과 애정의 마음으로 경의를 표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그대가 조국>을 봐야겠다. 이렇게하는 것으로 ‘참여’를 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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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끝에/악을 녹이는 독이 있어야/그게 참여다//붓끝에/청풍을 부르는 소리 있어야/그게 참여다//사랑이 있어야/눈물이 있어야/생명/다독거리는 손길 있어야/그래야 그게 참여다 <문필가>

이문재 선생님의 시 <오래된 기도>처럼 이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참여”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이”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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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의 발을 핥는 자는/반드시 패도覇道를 꿈꾸고/그가 치는 승전고는/피바다를 예고한다//욕망의 계곡을 누비며/연민도 없이/눈물도 없이/채워도 채워도 허기진 자/그들로 인하여/역사는/민초의 피로 얼룩져왔다 <피>

“박경리 선생님은 사적 공간에서도 늘 공적 영역을 사유한다”고 하고, “골방이 썪을 때, 광장이 무너지며, 광장이 타락할 때 골방도 병에 든다.”고 한 오민석 선생님의 말씀에서는 “어리석음과 탐욕, 성내는 마음으로부터 내 병이 생겼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병에 걸려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만일 모든 중생들의 병이 나으면, 그때 내 병도 나을 것입니다.”라고, 유마힐 거사가 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영원한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는 개인은 결국 자본주의라는 공적 시스템이 만들어 낸 것이”이고, “연민도” 없고 “눈물도” 없는 개인과 자본주의라는 공적 시스템을 연결하는 통로가 바로 ‘악’인데, “악에 대한 승리를 지향하는” ‘참여’는 이런 “악”과 싸우면 그것을 ‘녹이는 독’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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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팍 사이/시멘트로 꽉꽉 메운 곳/바늘구멍이라도 있었던가//돌바닥에 엎드려서/노오랗게 핀 민들레 꽃/씨앗 날리기 위해/험난한 노정路程/아아 너는 피었구나 <민들레>

‘바늘구멍’마저 사라질 미래에 ‘돌바닥’과 싸우는 '험난한 노정’에서도 ‘붓끝에/악을 녹이는 독’처럼 ‘참여’한 ‘민들레’의 선한 싸움을 보고 문학은 감동의 찬사를 보내는 것이라고 하였고,

아아
굶주림 같은 풍요로움이여
쓰레기 더미 같은 풍요로움이여
죽음에 이르는 풍요로움이여
눈물이 배어들 땅 한 치가 없네

<현실 같은 화면, 화면 같은 현실>의 한 부분과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히말라야의 노새>의 한 부분을 읽어주면서

“문학은 눈물의 언어이고, 곡비哭婢의 언어이며, 사랑의 언어이다.”라고 하는 오민석 선생님은 “(은유의 세계로)언어가 확장될 때 아프고 병든 자연은 동시에 아프고 병든 인간임을 지각”하게 된다고, 그래서 시는 ‘쓰레기 더미 같은’ 가짜 ‘풍요’를 통감하는 눈물로써 애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법문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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뙤악볕 아래/밭을 매는 아낙네는/밭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온 밭을 끌어안고 토닥거린다//밭둑길 논둑길이 닳도록 오가며/어미새가 모이 물어 나르듯 오가며/그것이 배추이든 고추이든/보리콩 수수 벼 어느것이든 간에/모두 미숙한 생명들이니/아낙에게는 가슴타게 하는 자식들이다 … (중략) … 밭을 끌어안은 아낙네는/젖줄 몰려주는 대지의 여신과 함께/번갈아 가며/생명을 양육하는 거룩한 어머니다 <농촌 아낙네>의 부분을 꺼낸 오민석 선생님은

박경리의 세계관 혹은 우주관은 ‘대지의 여신’과 ‘아낙네’ 그리고 ‘농작물(들)’을 순환고리로 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 순환고리를 이어주는 핵이 바로 ‘생명’이라는 것이다. “부분이 전체를 부르고 전체가 부분을 부르는 관계의 총화”를 총체성이라고 하는데, 박경리의 ‘생명을 양육하는 거룩한 어머니’를 사라진 생명의 총체성을 복구하는 문학으로 읽어준다. 그러면서 박경리(의 시) 문학의 최종 무게중심은 생명에 있다고 한다. 박경리가 골방(의 사적 영역)에서 광장(이라는 공적 영역)의 사유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경리(의 시) 문학에 배어있는 생명을 꺼내서 읽어준 오민석 선생님의 법문에 감동하고 감탄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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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자리에서 볼 때 기후위기 시대는 단지 기표로 나타나는 자연 기상(氣象)의 문제만이 아니다. 자본과 자연, 노동자와 자본가의 복합적 기의를 가지고 있는 기후위기 시대이다.

오민석 선생님이 박경리의 시에서 꺼내준 것에서 볼 수 있는, 네가지 ‘참여의 격자’를 통해서 진단해보자면, 기후위기 시대는 ➀악[자본]의 승리이고, ➁자연의 패배이며, ➂통감과 사랑의 사라짐이고, ➃생명성의 죽음이다.

문학은 어떻게 대응 할 것인가.
오민석 선생님은 박경리의 시를 읽어보니 보이더란다.

‘모든 부분은 전체의 부분이며, 모든 전체는 부분의 전체’이고, ‘지구가 병들면 어떤 개체도 행복할 수 없다’는 총체성의 사유[박경리의 우주관 혹은 세계관]가 필요하다.

“문학은 내용이면서 표현”이라고 한 오민석 선생님은 “다양한 문학 표현의 시도가 있어야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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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군사정권 시대
사위는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고
우리 식구는 기피 인물로
유배지 같은 정릉에 살았다
천지간에 의지할 곳 없이 살았다
수수께끼는
우리가 좌익과 우익의 압박을
동시에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만큼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
뼈가 으스러지게
눈앞에서 보아야 했던 세월
태평양전쟁 육이오를 겪었지만
그런 세상은 처음이었다
악은 강렬했고 천하무적이었다

<어머니의 사는 법> 부분을 읽으면서

‘좌익과 우익의 압박을/동시에 받았’던 박경리는 오히려 생명성을 핵으로 삼는 총체성의 세계관과 우주관의 시로써 ‘강렬’하고 ‘천하무적’인 악과 싸운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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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석 선생님은 박경리 시의 행간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행간을 받쳐주는 바탕에 관정을 뚫고 바탕을 받쳐주는 ‘것’을 밖으로 꺼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보니,
처음 가 본 평사리문학관 건물에서 걸려있는 <문학 & 생명> 편액을 <참여>로 읽어도 될 것 같다.

<문학>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다양한 표현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참여라고 할 수 있겠고,
<생명>은 총체성의 사유로써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다독거리는 자비로운 손길의 참여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참여 혹은 앙가주망이 내 공부[수행하는 삶]에서는 삼판參辦이다.

이렇게 악양 평사리문학관의 <문학&생명> 법회에 參辦托鉢삼판탁발 가서 ‘참여參與’를 나름 깜냥껏 공부했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사바하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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