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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4.09.03 나는 捨身者사신자다.
悟聖山 繩墨法壇
오성산 승묵법단
나는 부여 능산리에 있는 烏石山오석산을 1991년부터 悟聖山오성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곤수곡인 스승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해발 180m인 悟聖山은 烏山오산, 烏石山오석산, 烏積山오적산이라고도 한다.
오성산 아래 복숭아밭 가운데 있었던 능산리 승묵법단을 처음 온 게 40년 전이다. 운전면허증을 따기 전 해이니 1984년이겠다. 김일주 노점전사와 강해성 점전사가 주재로 있던 초가집 법단이었다. 강해성 점전사 짐을 실은 포터 트럭 가운데 앉아 천안을 거쳐 차령휴게소에서 쉬고 공주를 지나 부여읍 능산리까지 무려 다섯 시간도 넘게 걸려 도착했다.
검개 그을린 부엌의 낮은 부뚜막 아궁이에서 가마솥에 밥을 짓고 숯을 꺼내 그 위에 냄비를 얹고 오다가 산 손두부를 넣고 끓여준 김치찌개로 저녁 공양을 했는데, 그 풍경과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989년 1월 말에 군 제대를 하고 부여 왕릉 맞은편에 있는 오성산 승묵법단에서 1991년 이맘 때까지 살았다. 산에 잣나무 묘목을 심어서 해마다 여름이면 예초기를 메고 온 산을 더듬고 다녔었다. 다행히 벌에 쏘인 건 몇 번 뿐이었다. 그 잣나무들이 지금은 아름드리가 되었다. 예초기 업력이 꽤 오래되었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말이다.
추석이 앞이고 추석 쇠고 열흘 뒤면 昆水谷人곤수곡인 스승의 反白成道日반백성도일이다. 준비를 하느라 종단 捨身修行者사신수해자들이 벌초 울력을 하려고 모였다. 40년을 봐온 도반이 있고 30년 20년 10년을 봐온 도반들이다. 오늘 하루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곳 부여에서 이틀 장성 방장산 진덕법단 수양원에서 하루를 더 하는 이박삼일 일정이다.
이나마 오늘 장흥 일정을 취소하고 왔는데 내일은 다시 장흥 일정을 봐야해서 모레 장성 방장산 진덕법단 수양원 울력은 함께할 수 있겠다. 이 일이 우선이어야 하는데 어쩌다 장흥 일정을 우선하고 있다. 어쩌겠는가 흐름대로 해야지.
군데군데 어린 소나무가 보인다. 예초기를 돌리다가 흠칫 놀라서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 봤다. 어떤 것은 올해 나온 것이고 어떤 것은 이삼년은 자란 것이다. 작년에 누군가도 나처럼 멈칫했었겠구나 생각을 하니 같은 마음 같아서 뿌듯하다.
그나 할거에 안거 다니다 보니 안거에 안거 다니던 때에 비해서 풍경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안거에서는 안 보이던 것이 할거에서는 보인다. 시야가 달라진 것이다. 시선의 층위가 달라지니 다른 층위의 풍경이 보이는 것이다.
관점은 같다고 하더라도 관점의 층위에 따라서 보이는 풍경이 있고 안 보이는 풍경이 있는 것이다. 내가 태어났다는 불갑(선들)을 지날 때 그랬다. 안거에 안거 다닐 때는 안 보였던 불갑저수지와 불갑천 그리고 선들이 할거에서는 한 눈에 보였다.
각자 흩어져서 예초기를 돌리지만 새참을 먹을 때 잠깐 쉴 때 모여 있으니 말 없이들 있어도 좋다. 흐믓하다.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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捨身사신

 

나는 捨身者사신자다.

 

捨身사신은 말 그대로 “몸을 버렸다[依귀의 하였다]”는 뜻이다.

얼핏 내가 선택한 종단[संघ saṃgha 僧伽]에 捨身사신[依귀의] 한 것 같지만

나는 실은 세상[俗속]에 사신捨身[依귀의]한 것이다.

 

황모님으로 말미암아 내 선택으로 사신한 종단, 국제도덕협회(일관도)는 오교(성인)의 성리심법(이라고 하는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 오교는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회교[이슬람교]를 말한다.

 

나는 (선험적으로) 알아서 선택을 했든, 선택을 한 뒤에 알게 됐든, 종단으로부터 배운 삼교합일이나 오교합일보다는 삼교본일이나 오교본일이라고 한다. 셋 다섯을 하나로 합한 것이 아니라 셋 다섯이 본디 하나에서 비롯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다.

 

捨身修行者사신수행자라고 하기도 하고

捨身出家修行者사신출가수행자라고 하기도 한다.

요즘은 出家僧侶출가승려 또는 捨身出家僧侶사신출가승려라는 말을 쓴다.

 

조금 복잡하지만, 내 공부로는

세상에서 세상을 떠나 세상 속 세상에서 사는 이가 捨身者사신자이고 捨身修行者사신수행자인 것이다.

 

나는 우리나이로 열일곱 살인 1982년 5월 5일(음력 사월 열이튿날) 곤수곡인 스승의 허락에 따라 龍頭峯용두봉 仁悳法壇인덕법단에서 박희열 노점전사님이 立願辦事입원판사하여 捨身立願사신입원을 했다. 내가 求道立願구도입원한 곳도 인덕법단이라고 한다. 세 살 때인 1969년이었다.

 

열일곱 살 때야 뭘 좀 알고 사신입원을 했다지만, 세 살 때는 뭘 알아서 求道구도를 하고 立願입원을 하였겠는가. 비록 내 기억에는 또렷하게 없지만 求道儀禮구도의례를 했었다는 것이고, 그로써 明師一指點명사일지점을 수지하게 됐다는 것이니 나는 그저 그리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알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내 사유가 비롯하고 있으니 이 점이 참으로 신묘하다.

 

말미암아 생겨나는

만물은 서로 도우고,

비롯하여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억불상회 해조국수를 팔면서, 벌초노동탁발을 하면서,

사람스러운 사람들이 사는 세상, 이 俗에서 문화연대 예우와 함께

捨身修行者사신수행자로 산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이 말한 <상호부조론>을 떠올랐다가 곧바로 ‘녹색평론 김종천’ 선생님이 말씀하신 “밥”이 잇따라 떠오르더니, 오늘 하루 내내 이 “밥”이 염두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밥 / 김종철

 

‘밥’이라는 게 본래 공양이라는 뜻이잖아요. 자기희생이라는 뜻이죠. “너는 내 밥이야” 이러잖아요. 밥이란 게 희생이란 뜻이에요. "저 놈은 내 밥이다" 이런 말을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잖아요. 저 인간 내 맘대로 이용해먹겠다는 소리지만, 사실은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산다는 얘기거든요. 밥이란 게 원래 그런 뜻이에요.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만물이 저마다 누군가의 밥이 되어야 돌아가게 되어 있잖아요. 지금은 우리가 누군가의 밥이 되지는 않고, 저 혼자 일방적으로 먹으려고만 하니까 세상이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밥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해요.

 

내가 먼저 누군가의 밥이 돼야 한다는 거지요. 농사를 짓는 농부를 우리가 도와서, 농민들에게 우리가 밥이 돼줘야 해요. 그리고 농민은 우리들을 위해서 밥이 되고요. 이런 식으로 순환을 계속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의 밥이고, 아이들은 늙은 부모의 밥이 되어 부모에게 공양을 바치고... 이런 식으로 모든 존재가 모든 존재에 대해서 밥이 되는 것. 해월 선생이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아름다운 표현으로 말씀하셨잖아요. 한울님이 한울님을 먹고 산다고. 존재하는 모든 게 한울님이라고 하셨잖아요.

 

‘밥’을 절에서는 ‘공양(供養)’이라고 하잖아요. 절집에서는 “밥 먹는다”라고 안 하고 "공양한다”라고 하잖아요. 왜 그런 말을 쓰는지 사실 스님들도 정확히 아시는 분이 많지 않아요. 원래 예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공양’이라는 말은 본래 공희(供犧 이바지할 공, 희생할 희)라고 번역되는 힌두어 ‘야즈나(yazuna)’에서 온 말이거든요. '야즈나’라는 것은 자기를 바친다는 의미, 즉 희생이라는 말인데, <바가밧기타>에 보면 이것이 고대 인도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인 것 같아요.

 

우주의 질서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자기희생’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밥’이죠. “네가 내 밥이다” 이렇게 얘기하지 말고, “내가 너의 밥이다”, 이렇게 생각을 전환시켜야 해요. "내가 네 밥이다. 나를 먹고 네가 건강해져라.” 서로가 이렇게만 하면 모두가 행복해져요. 이게 바로 이천식천의 마음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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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참 반가운 며칠을 보내는 중이다.

 

덕분에 <부산지역 해고노동자 생계비지원을 위한 만원의연대>와 (사)부산인권플랫폼 파랑, 부산지하철노동조합, 부산지역공공기관노동조합협의회 등이 하고 있는 부산지역 해고노동자와 인권활동가를 위한 추석나눔 모금 운동에 조금이나마 “밥”을 부조할 수 있게 됐다.

 

이게 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은 그대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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