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카테고리 없음 2022. 12. 31. 21:45

선물

오늘 아침에 수거한 아이스팩을 깨끗이 씻고 헹궈서 시장 상인들에게 전해드렸다. 이어지는 일정은 아침 공양이다. 1년 365일 년중무휴인 콩나루국밥집으로 가서 뜨끈한 국밥으로 찬 속을 데웠다. 나는 늘 먹던데로 콩나물만 넣은 돌솥밥으로 공양을 했다.

밥을 먹으면서 장평 사는 승군 형이 책 살 거 있으면 사줄테니 말하란다. 책값으로만 쓸 수 있는 비용으로 지원 받은 20만 원이 있는데 여태 못 쓰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까지가 기한이어서 오늘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승군 형은 교보문고나 알라딘 같은 대형서점에서만 책을 살 수 있다고 하면서 온라인으로 주문을 하자는 것이다. 밥 먹고 커피 마시러 가서 차분히 주문을 하기로 했다.

커피 마시는 동안 만교형이 폰을 톡톡 두드리면서 로그인을 하고 책을 고를 때 내가 막 덤벼들었다. 폰에 저장해 놓은 책 목록을 꺼내서 들이밀었다. 예닐곱 권은 됐다. 결제를 하려는데 잘 안 되는지 버벅거린다. 그 와중에 박형대 의원이 뭘 찾아봤는지 지역 서점에서도 살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한다. 승군 형은 아니라고 한다. 혹시 모르니까 알아는보자고 해서 1944년에 개업해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 마을서점 문화당에 전화를 했다. 카드로 책을 살 수 있다는 답을 듣고 문화당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아직 열지 않은 문 앞에서서 쥔장한테 문 열어달고 전화를 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쥔장 부부가 휘둥그래 하거나말거나 일단 지원금이 처리가 되는지 책 한 권을 사들고 승군 형 카드로 결제를 해봤다. 됐다. 나이스. 박형대 의원은 하얼빈 한 권을 골랐다. 만교형은 서너 권을 골랐고 나는 왕창 골랐다. 고르고 보니 여섯 권이다. 정길은 아예 멀뚱하고 승군 형도 책 한 권도 고르지 않으면서 오히려 지원금 한도를 넘은 건 자기 돈으로 사주겠다고 한다. 그럴수야 있나. 더 나온 만칠천 원은 내가 결제했다. 오졌다. 이승군 형 책 선물 고마워요.

덕제 평장마을 빛깔 선생님 댁으로 향했다. 마을 입구에서 전화를 했더니 집으로 들어오라신다. 김영숙 권사님이 내려주는 커피 한잔 하는 동안 바삭하게 구워준 그랑께롱 빵 세 조각 먹었다. 마동욱 선생님께 이따 여럿이 모여 저녁 공양 같이 하자고 했더니 마다신다. 서운함이 아직 풀릴 때가 아닌 듯해서 더는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 때가 있겠지.

빛깔 선생님 댁에서 나와서 송산마을 또랑새비네로 향했다. 찐한 에스프레소 한잔 마시고 싶었다. 오래된숲 입구에 안거를 세우고 루치아노한테 전화를 했는데 안 받는다. 주무시나? 안거에 안거 잠깐 해찰하는데 빗자루로 골목으로 흩어진 잔돌을 쓸어 올리는 이가 옆거울에 보인다. 가만보니 오래된숲 쥔장 윤영소 선생님 같았다. 나가서 보니 맞다. 홍천에서 어제 오셨단다. 조금 어색했지만 불쑥 포옹을 했다. 서재에서 몇 마디 나누다가 점심 공양 같이 할 건지 물으신다. 좋지요. 내 선택지는 뻔했다. 도깨비방망이 보리밥이거나 황손두꺼비 보살님이 알아서 끓여주는 된장국, 아니면 화풍이다. 화풍 능이버섯덮밥은 언제 먹어도 좋다.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 전에 윤영소 선생님은 특유의 입담이 터지셨다. 인도의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했다는 구마라집을 떠올리게 하는 구라가 좋아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수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말씀에 분수를 배울 때 기억이 떠올랐다. 요즘 부쩍 과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 분수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분수를 배워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가방에서 작은 손가방을 꺼낸다. 거기서 연필을 꺼내시는데 골무처럼 연필심을 보호하는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겁나 멋지다고 했더니 쓰던 연필 한자루 주신다. 냉큼 선물로 받았다. 고맙습니다. 윤영소 선생님.

역시 밥을 먹었으니 차를 마셔야지. 화풍에서 물숲까지 걸었다. 윤영소 선생님과 장흥 읍내 골목을 걸은 게 처음이다. 최연택 선생님 나이를 듣고는 깜짝 놀란다. 동년배쯤으로 알았다신다. 물숲 문앞에 앉어있던 지산이 반긴다. 지산과 두꺼운 포옹을 했다. 지산한테 1년 동안 마신 물숲 커피를 다 합친만큼 행복한 커피를 내려달라고 주문했다. 여느 때하고 달리 찐하게 내려준 커피를 작은 잔에 담아 내준다. 지산은 아까 내가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싶었다는 걸 알았을까? 이제부턴 이 커피를 마실거라고 했다. 고마워 지산.

엊그제 준희 군 고전기타 연주회 때 잠깐 인사 나눈 김은주 상담복지센터장이 준 다이어리가 떠올랐다. 국민학교 1학년 때 생활통지표에 글씨를 못 쓴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글씨가 엉망이다. 글씨만 봐도 그사람 성격을 알 수 있다는데… 차분히 한자 한자 글씨를 쓰면 될텐데 그렇지 못해서 괴발개발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했다. 참 많이 복잡하고 미안하고 고마운 한 해였다. 서툴지만 마음을 담은 손글씨를 써서 미안하고 고마운 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 다이어리를 펼쳤다. 어디다 글을 쓸까 뒤적이다 펼쳤는데, 2023년 12월 31일과 2024년 1월 1일의 두 면이 한 면으로 들어온다. 세로 둘이 가로 하나가 되는 면이다. 좋다. 그래 여기가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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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가 일년이다.
오늘 하루 잘 살았다.
오늘, 일년을 잘 살았다.

맨날만날 온 날, 오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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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가 일년이다.
오늘 하루 잘 살아보자.
오늘, 일년을 잘 살 수 있는 날이다.

送舊迎新

Posted by 곡인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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