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님들의 선어는 왜 비유가 상냥하지 않고 불친절하고 배배 꼬여있는지요?”

 

손바닥도량에서 인연한 이상수 선생님의 물음에 답합니다.

 

수행자들은 스스로 공부하겠다고 나선 자들입니다.

공부는 이면과 바닥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여깁니다.

 

제 공부로는 '(切磋)琢摩'()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선사님들의 선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 3자의 입장에서 해석해야 하는 저도 마뜩잖습니다.

 

何以故 왜 그런가 하니,

如是 이와 같습니다.

是故 그러므로,

如是我觀 저는 이와 같이 헤아리고 살펴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1.

“‘선어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3자의 입장에서 해석해야한다든지 하면서 굳이 부연하였습니다.

 

그전에, ‘(불법과 변별하는)불교를 북방의 격의(불교)와 남방의 초기(불교)로 구분하는 걸 따릅니다. , 선어, 선어록은 주로(라고 쓰고 거의) 격의(불교)에서 씁니다. 격의(불교)를 선불교라고도 합니다. 붓다[Buddha; '깨달은 자', '눈을 뜬 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이야기한 법[Dharma]이 전해지는 방식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이야기한 법의 흔적(이라는 것) 중 하나를 금강경이라는 불서로 번역한 인도(서역)의 쿠마라지바(कुमारजीव Kumārajīva)’중국(동양)에서 구마라집이 된 것을 참고합니다. 더하여 번역은 오역이다.’세상은 해석과 설명이다.’라는 것을 念頭(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제 공부는 제 깜냥으로 선택하고 번역하고 해석한 흔적의 결과입니다. 제 공부로 들인 선어는 가리킴이고, 선어록은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저는 선어선어라고 하는 것[선어록]’으로 변별하고 있습니다. 선어가 불법이라면 불교는 선어록과 같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선어는 말 그대로 선[불법; 붓다(고타마 싯다르타)가 이야기한 법]에 닿거나 이르려고 하는 모든 짓을 말() 하는 것입니다. 선어록에는 말이 아닌 침묵과 몸짓도(선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어의 문답을 기록한 것이 선어록입니다. 이 선어는 붓다 고타마 싯다르트가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야기한 법에 관하여 공부하는 수행자들이 서로 문답하는 와중에 생깁니다. 공부하려고 마주한 두 사람이 각자 공부한 것으로 서로 묻고 답하는, 하고 하는 찰나, 공부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잇는 행간이 선입니다. 이 행간을 함의한 물음이 선어이고, 이 물음에 답하는 말[]이 선어입니다. 선어는 나, 나와 너의 1:1로 마주한 관계에서만 생깁니다. 3자의 해석(이나 평론 혹은 설명)이 아닌, 너와 나의 사이에서 생긴, 나의 정도에 관한 것이므로 내 공부의 결과로 상대에게 한 말이 선어입니다. 물론 기록으로 남겨 전할만한 문답이라는 누군가의 선택[해석]이 있어야 찰나로 증발하지 않고 전해겠지만요. 선어를 주고받는 선문답은 영원을(이라고 쓰고 내 공부의 결과라고 읽음) 찰나에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제 공부가 이와 같다 보니, 어느 시인의 시집에서 본 모든 결과는 비로소 과정이었다.”를 번번이 확인하면서 유지하고 있습니다.)

 

붓다 고타마 싯다르트의 拈花示衆(염화시중)의 물음에 微笑(미소)로 답한 제자 가섭이 결국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법()을 이은 제자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拈花微笑로 답한 선어는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와 제자 가섭, 나와 너, 단둘 사이에서 상호동시 허락[이해, 수용]할 때에만 생기는 일[]이었습니다. 선어와 선문답은 이렇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좀 더 자세히 할 때 제가 종종 예를 드는 게 허무개그(대화)’입니다. “, ~”라고 하면서, 자극한 나의 의도에 상대가 반응하지 않은 것에 실망하여 다시 내가 원하는 반응을 끌어내려고 추궁하지 않고 상대의 (엉뚱한) 반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3자가 볼 때 허무하게) 끝내는 대화를 저는 선문답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여깁니다. 3자가 볼 때 허무하다고 여긴 것일 뿐, 상호동시에 허락하여 끝낸 두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상호동시에 이해했는지 아닌지는 문답의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저 3자의 궁금함일 뿐입니다.

 

2.

<그렇다면, 과연 제자 가섭의 微笑는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한 拈花示衆의 물음[]에 대한 (올바른) []이었을까요?>

 

()문답은 물음(과 답)(선문으로)해석하고 (선답으로)번역하여 설명[]하는 상호과정[]입니다. 방점은 해석번역에 두었습니다. 해석과 번역은 해석하는 자리[frame]]와 번역하는 자리[tool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리붓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았다(고 전해지)입니다. 이 자리는 내가 앉아 있는 거인의 어깨이면서, 내 공부로 선택한 (자칫 확증편향이 될 수도 있는)믿음이기도 하고, 내 수행이 바라는 지향이기도 합니다. 제 공부에서 이 해석과 번역은 제 공부로 선택한 자리[(생각)]를 쓰는 일[]입니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홍세화의 책, ‘생각의 좌표에서 본 말[물음]입니다. 이 문장을 처음 본 순간 '父母未生前 本來面目(胎於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은?)'이나 是甚麽(이 뭣고?)’祖師西來意(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같은 화두로 들였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專精思惟(전정사유)의 방법[tool]으로 깨달아 확인한 것이 모든 것은 緣起(연기)한다‘12緣起法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비로소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법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선택한 수행의 방법과 공부의 과정에서 깨달음[頓悟]의 전환으로 자리가 달라졌습니다. 이 자리를 바탕으로 한 관점[; 생각]’이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법이라 여깁니다. 제가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부문 중 가장 우선하는 것이 바로 이 [생각; 관점]’과 생각[, ]이 비롯하는 자리입니다.

 

법을 공부하는 수행자들이 공부로 주고받는 말, 이 말이 오고[如來] 가는[如去] 문답 사이에 있는, 행간이 된 붓다의 법을 함의한 말[][如來()]이라 여기고, 시니피에를 함의한 시니피앙과 시니피앙 사이를 이어주는 맥락(Context)이라 여깁니다.

 

3.

그럼 이제, 물으신 선어는 왜 비유가 상냥하지 않고 불친절하고 배배 꼬여있는지에 대하에 제 공부로 답합니다.

 

(切磋)琢磨이고 啐啄(同時)이기 때문입니다.

 

선은 ! 하고 건드리는 자극[물음; 마중물]입니다. 이 자극에 어떻게 반응[대답; 작두샘 퍼 올림]하는지에 따라 다시 탁! 하는 자극(반응)을 줍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 안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라고 한,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생존한 로고테라피의 창시자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출신 신경학자 빅터프랭클(Viktor Emil Frankl)의 공부를 참고합니다.

 

공부[발심]하는 계기가 되도록 憤心(분심)을 일으키는 자극(반응), 다그치고 추궁하면서 궁지로 몰아넣는 자극(반응), 시비 거는 듯 빈정거리거나 조롱하는 반응(자극) 등과 같이 상냥하거나 친절함은 차치하더라도 관점에 따라선 무례하기까지 한 사례들도 있습니다. 대개 친절하거나 상냥하기를 기대하였던 혹은 내가 생각하거나 바랐던 (태도를 포함한)대답[반응]에서 어긋났고 벗어나는 사례가 많습니다.

 

선의 한 부분이 ()이기 때문이고, 내가 생각하거나 바랐던 것을 망상이라고 여기게[깨닫게] 하는 자극이 선[공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한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를 유지하고 깨지지 않게 지키려는 생각을 깨부수자는 것이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깨질 게 없을 때까지 깨()야 본디의 그 자리에 닿습니다. 깨달음[() 닿음]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깨질 것이 없어서 깨지지 않고 깰 수 없는 것을 金剛(금강)’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諸行無常(제행무상), 諸法無我(제법무아), 涅槃寂靜(열반적정) 그리고 一切皆苦(일체개고)

 

출가수행자든 재가수행자든 붓다(고타마 싯다르타)가 이야기한 법을 공부하겠다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걸림 없이 사는 無碍를 선택했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解脫을 지향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붓다의 법을 선택해서 공부하는 선사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걸림 없이 살라고 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상냥하지 않고 불친절하고 배배 꼬인 말을 하는가?

 

제 공부로는 頓悟漸修(혹은 漸悟)에 그 이유가 있다고 여깁니다. 격의(불교)로 붓다의 법을 공부하는 수행자들 사이에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돈오와 점수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육조단경을 꼽습니다.

 

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수요

心如明鏡臺 마음은 명경대라

時時勤拂拭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勿使惹塵埃 티끌이 끼지 않도록 하자!

 

신수의 글[게송]을 읊조리는 수행자의 말을 들은 혜능이 그 말[게송]에 대하여 한 말[게송]이 그것입니다.

 

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디 나무가 아니고

明鏡亦非臺 명경 또한 ()가 아니어서

本來無一物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何處惹塵埃 어디에 티끌이 낄 데가 있겠는가!

 

요즘 같으면 아재개그라고 하거나 말장난 같다고 할 혜능의 이 말[게송]은 염화에 미소를 지음으로써 붓다의 법()을 이은 가섭처럼, 가섭을 이은 (초조)달마를 통해 (5)홍인으로 이어진 붓다의 법이 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글을 쓸 줄도 모르는 혜능에게 이어집니다. 이때부터 붓다의 법은 南宗 頓悟北宗 漸悟로 갈리면서 남돈 북점의 선[]은 사방으로 펼쳐졌고, 임제 의현 선사에 의해 수렴되어 해동으로 이어진 조계(6조 혜능)의 선[]은 일제와 독재의 시절을 거치면서 표면으로는 간화선을 종지로 하는 조계종에 (고여)있는 것처럼 알려져 있습니다.(통시적이고 공시적으로 얼기설기 엮여 있는 매우 복잡한 내력을 몇 문장으로 아주 거칠게 썼습니다.)

 

아무튼, 육조(혜능)의 공부를 따르고 있는 수행자 대부분은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이야기한 법을 선으로 해석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선사들의 선어는 대개 전등록과 1,700 공안, 임제록, 그리고 벽암록의 100칙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말씀마따나 상냥하지 않고 불친절하고 배배 꼬여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 망이)으로 매질을 하거나 느닷없이 버럭 (; 고함)을 하거나 뜬금없고 밑도 끝도 없이 상식밖에 乖角[]을 한다거나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미화해서 말하자면 수행자마다 선택한 가풍과 종풍이 다르고 선 수행을 선택한 수행자마다 선풍이라 여기면서 하는 공부의 흔적들입니다.

 

선어는 1;1 관계의 문답에서 비롯합니다. 물음[자극]의 촉발이 있고 그 물음에 답하는 대응이 있어야 선어가 생깁니다. 마치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처럼요. 위에서 언급했습니다만 묻는 방법이 상냥하지 않거나 불친절하거나 거칠고 무례하고 심지어 폭력적이기도 합니다. 단박에 깨닫자는 돈오의 열망(이라고 썼지만 조급함이거나 어설픔이라고 읽을 수 있음)에서 기인한다고 여깁니다.

 

제 공부에선 물음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에게 알려주기 위한 물음이고, 둘째는 내가 아는 것을 상대가 아는지 모르는지 떠보거나 견주기 위한 물음이고, 셋째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상대에게 묻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묻음에 대답하는 것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은 알려주는 것이라 하고, 물음에 답하고 그 답에 대해 다시 묻고 다시 물은 것에 대해 다시 답하면서 꼬리 무는 것처럼(상호동시 허락하지 않으면 자칫 말꼬리 잡는다고 하는 경우 있음 주의) 여러 번 묻고 답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가르고 쳐주는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알려주는 것은 상대의 물음에 내가 한(이라고 쓰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준 것이라고 읽기도 함) 대답을 상대가 이해하였는지 확인하기 위해 묻고 상대의 대답에 따라 과정을 한두 번 더 거치지 않는 것인데 비해서, ‘가르쳐주는 것은 상대가 알게 해주는 것이기도 해서 내가 알려준 대답을 상대가 이해하였는지 확인하는 물음을 거듭하면서 상대의 답이 내가 알려준 것에 이를 때까지 계속 문답을 이어가는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흔히들 척 보면 모르겠냐하면서 한눈에 알아보라고 하고, ‘쿵 하면 담 너머 호박 떨어지는 소리인지 알아야 한다라고 하는데요, 저는 겪어 봐도 모르는 게 있고, 담 넘어가서 직접 보기 전에는 모르겠습니다.

 

물음이 없이 답을 말하고 상대의 그 답에 대하여 어떻게 그 답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답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혹은 그 답에 대해 내가 이해한 것은 이러이러한데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물어서 확인하지 않고 서로 내 답만 하다 보면 결국 답답한 상황이 생깁니다. 상대의 물음에 올바른(이라고 쓰고 상대가 바라는 것이라고 읽음) 대답을 하려면 물음을 이해하기 위한 물음을 하고 답을 들어야 하는데, 묻고 답하는 과정 없이 답을 말하고 그 대답에 다시 답을 하고 또 답을 하면 그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중용 20장에서 말하는 博學(박학), 審問(심문), 愼思(신사), 明辯(명변), 篤行(독행)般若(반야)五悳(오덕)[般若五悳]으로 들여 제 공부의 방법으로 삼고 있습니다. 박학[자극; 마중물]을 경청과 수용으로 (해석)하여 심문(신사, 명변, 독행)의 과정을 통해 신사, 명변, 독행(은 상대에게 박학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음)으로 반응합니다.

 

4.

수백 년 동안 암송과 구전(如是我聞)으로 이어진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말[묻고자 한 바와 답하고자 한 바를 한 말, ]들을 결집한 것이 경[]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구마라집이 번역한)金剛經(금강경)을 최초의 선어록으로 여기고 있고, 금강경 중 如是我聞(여시아문)於意云何(어의운하)를 불법을 공부하는 불교의 키워드로 꼽고 있습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於意云何, (너는) 어찌 생각하는가?

 

5.

, 선어, 선어록 등에 대해서 살폈던 때가 있었습니다. 뒤져보니 흔적 몇 개 있어서 그 가운데 하나를 옮겨봅니다.

 

가르침의 교육과 가리킴의 공부(20066월 기록)

 

불교의 가르침과 불법의 가리킴은 양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면인 뫼비우스의 띠 같고, “道不遠人 人遠道(도불원인 인원도), 山不離俗 俗離山(산불리속 속리산)”이라고 한 것처럼 등을 맞대고 앉아서 마을을 등지고 산(을 등지고 마을을 향하고 있는 대웅전 부처님)을 향하는 수행자와 산을 등지고 마을로 향하는 수행자의 뒷모습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尋牛(심우)360도가 入廛垂手(입전수수)0도임을 보여주는 화순 운주사에 있는 石造佛龕 雙背佛(석조불감 쌍배불)의 가르침과 가리킴은 두께 없이 투명한 양면과 같다.

 

雙遮雙照(쌍차쌍조)는 서로 차단하고 서로 비추면서 서로 가리킴의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솔직한 탁마 공부이다.

 

어떤 이의 가리킴을 가르침으로 회향하는 것이 불교의 교육이고,

어떤 이의 가르침을 가리킴으로 회향하는 것은 불법의 공부이다.

 

불법을 교육할 수 있을까?

 

敎育이라는 것이 가르치고 기른다는 뜻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교육은 한마디로 습업을 가르고, 치고, 길러낸다는 뜻이겠다. 습업이 무엇인가? 이미(서로) 그리하기로 한 그것이다. 말과 제도, 문화, 관습 뭐 그러한 것들이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하는 저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습업이다. 그러나 이미 그리하기로 한 그것을 나와 당신은 그리하자고 동의한 적도 없고, 그리하라고 허락한 바 없다. 그렇지만 저자거리의 습칙(習則)은 나와 당신의 허락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촘촘한 습칙의 관계망으로 나와 당신을 에두르고 있다. 이렇게 저자의 습칙에 촘촘히 에둘린 나와 당신은 저자의 습칙이 가르치는 것에 어떠한 반응함도 없이 그 습칙대로 길들어간다. 결국, 나와 나들은 저자의 습칙을 가르치는 습칙전도사가 되어 또 다른 습칙전도사를 길러 내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다.

 

어떤 이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하였던가? ‘그것이 선지식이다. ‘어떤 이가 아니라 그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하였던, 어떤 이의 가르침이 선지식이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의 가리킴이 선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그 자가 선지식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리킨 그 행간이 함의한 것이 선지식이라는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무리 많다 해도 가리켜진 달은 하나이다. 달을 가리키는 것[과정, 수단]이 손가락이 아니고 똥 막대기라고 해도 가리켜진 것은 달이다. 달을 가리키는 것[방법, 형식]이 손가락이 아니고 내미는 차 한 잔이라고 해도 가리켜진 것은 달이다. 달을 가리키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후려치는 몽둥이질이라고 해도 가리켜진 것은 달이다. 달을 가리키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느닷없이 질러대는 고함이라고 해도 가리켜진 것은 달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달이 천개의 강에 두루 비추는 것처럼, 하나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질인 것이다.

 

눈 부릅뜨고 앞을 잘 지켜서, 저자의 습칙이 가르치는 것에 속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고, 간택을 잘 하면, 습칙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습칙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볼 줄 알게 된다. 그렇게 저자의 모든 습칙은 본래 스스로가 달을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확연히 알게 되는 것이 자각이다. 그러나 습칙전도사들마다 나름대로 이 자각에 이르는 공식과 방법을 가르치므로 이로 인하여 자각에 이른다는 공식과 방법은 부지기수로 많아졌다.

 

그렇게 가리킴의 자각에는 이르러 보지도 못한 채 가르침의 습칙으로만 길들여진 습칙전도사들은 가리킴의 공부보다는 여전히 저자거리의 습칙을 가르치는 교육만을 하고 있다.

 

어쩌랴!

이것 또한 저자거리의 습칙인 것을!

 

이렇다보니

불교는 교육으로 전해지고

불법은 교외별전으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격외구가 교외별전인 것은 아니다.

언외언도 교외별전인 것이 아니다.

 

교외별전과 격외구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격외구나 언외언의 선어록은 교육용 교재일 따름이다.

교외별전의 법은 경구나 선어록에 있지 않다.

 

6.

쓰고 보니, 몇 줄로 답해도 될 물음이었는데 중언부언 길게 썼습니다. 상냥하고 친절하게 답하고 싶었나 봅니다. 종풍이나 가풍과 무관하게 제 성향[業習]과 지향하는 공부는 이와 같습니다.

 

Posted by 곡인무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