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LES ANNÉES
LES ANNÉES
사회를 바꾸기 위해 통합사회당에 남아 있었던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마오, 트로츠키주의자들, 엄청난 양의 이념들과 개념들을 알게 됐다. 사회적인 운동, 서적들 그리고 잡지들, 철학가들, 비평가들, 사회학자들이 곳곳에서 나왔다 : 부르디외, 푸코, 바르트, 라캉, 촘스키, 보드리야르, 빌헬름 라이히, 이반 일리치, 텔켈, 구조적인 분석, 서사학, 생태학. 어차피 '상속자들(피에르 부르디외 저서)'이건, 섹스 자세에 관한 스웨덴 소책자이건, 모두 새로운 지식과 세상의 변화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개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전대미문의 언어들 속을 헤엄쳤으며, 이 모든 것들을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한 달 만에 몇 년을 따라잡았다. 낡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공격적인 것들, 감동적인 것들, 더는 새로 배울 것이 없어도 터번을 쓴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를 되찾았음에 안도했다. 앙드레 브루통은 안타깝게도 2년 일찍 세상을 떠났다. (LES ANNÉES by ANNIE ERNAUX ©EDITION GALLIMARD, 2008 / 세월 ©1984BOOKS 2019 / 아니 에르노/신유진 옮김 131, 132쪽)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긴 것 중에 어느 하나도 자명한 것은 없었다. 가족, 교육, 교도소, 직장, 휴가, 광기, 광고, 모든 현실은 검토를 받게 됐다. 비판하는 자의 말도 마찬가지로 '지금 네가 말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라는 물음으로 자신의 근본, 가장 깊은 곳을 살피기를 요구받았다. 사회는 순진하게 기능하기를 멈췄다. 차를 사고, 해야 할 일들을 적고, 출산하는 것, 모든 것이 의미가 있었다.
이 지구상의 어떤 것도 우리에게 낯선 것이 되어서는 안 됐다. 대서양, 브뤼에 앙 아르투아의 범죄사건, 알렌드의 칠리, 쿠바, 베트남, 체코슬로바키아 우리는 모든 투쟁에 참여했다. 제도를 평가했고 모델을 찾았다. 우리는 보편화된 정치적 시각으로 세상을 읽었다. 가장 중요한 단어는 <<해방>>이었다. (세월 132,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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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종의 취한 상태에서 마약, 환경오염 혹은 인종차별주의를 주제로 두 시간 동안 이어진 토론을 마치고 나오면서 학생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는 것이 아닌가, 헛수고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어쨌든 학교는 무언가에 쓸모가 있었다. 우리는 끝도 없이 묻고 또 물었다.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일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 우리는 모든 것을 시도해도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1968년은 세상의 첫해였다. (세월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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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사람은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에 호숫가
가을에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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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생이니까 황모님 또래다. '아니 에르노'가 2008년에 쓴 소설 <세월>을 읽고 있다. 손바닥만한 <세월>을 바랑에 담은 지가 한참 전인데도 여태 가지고 다닌다.
나도 내 한 삶의 흔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게 생각났다. '성장소설'이라는 정채봉의 소설 '초승달과 밤배'를 봐서 그랬을까. 내 삶을 '소설처럼' 정리하고 싶었다. '소설처럼'이라는 말 속에는 솔직하게 쓰는 '일기처럼'이라는 뜻이 있다.
나도 흉내를 내본다.
1979년은 세상의 첫해였고, 1982년은 삶의 시작이었다.
1979년 6월 6일과 그해 겨울, 그리고 1982년 5월 5일. 흑석동 용두봉, 仁悳法壇에서 보냈던 시간들과 격은 일들.
그리고, 그리움.
아득한 이 그리움. 연원을 알 수 없는 이 그리움. 어디서 어떻게 비롯했는지 알 수 없고, 어디를 향하는지 어디에 닿으려고 하는지도 알 수 없는 그리움. 비워지지도 않고 채워지지도 않는 꽉 찬 이 그리움.




바라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