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인무영 2022. 12. 30. 14:09



두께

 

꿈을 꾸느라 몇 번이고 잠을 뒤척였다. 긴가민가 꿈인지 생시인지 경계를 확정짓지 못한 채 잠을 깼다. 결국 꿈이었다. '슈레딩거의 고양이’, '앞이면서 동시에 뒤인 동전’, '살이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는 고양이’,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인 것’, ‘하나인데 둘인 것, ‘여러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는 중첩’, ‘보기 전과 본 뒤’가 그렇다. '미시의 세계와 거시의 세계' '미시와 거시를 가르는 경계는 어디인가’, '미시의 두께는 얼만큼이고 거시의 두께는 어느정도인가’ ‘운동과 위치’를 동시에 보는 관계의 반비례성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하이젠베르크가 주창했다는 불확적성 원리’라는 것은 또 뭔지…

깨고 보니 내가 평소 쓰던 "두께없이 투명한 양면의 경계"에서 비롯했을 것 같은 꿈이었다.

어제 새로운 수행결사라는 ‘불이선회’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자칭 사신출가수행자로 살고 있는 내 입삶을 반성하고 성찰하게 하는 마중물이었다. 行行本處(행행본처)이고 至至發處(지지발처)라는 것처럼 ‘운동과 위치’가 동시에 생멸하는 와중이 세상이다.

마을도량에서 混俗心法으로 繼開修行을 하겠다면 ‘안 선지식’을 구하는 일을 우선으로 두어야지 않겠나. #

요 위까지가 그제 아침에 쓰다 만 글이다. 다시 꺼내서 읽어보다가 마무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가 흐르는 물숲에 안거 커피를 기다리면서 토독톡톡 자판을 두드린다. 생각이 두드리는 것인지 생각을 두드리는 것인지. 두드릴 때 손가락 끝에 닿는 생각이 글로 나타나는 걸 보면서 두드린다. 종이에 연필이나 볼펜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면 글 쓰는 게 수월하다. 같은 손을 쓰는 것인데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는 건 아무래도 자판을 두드리는 게 낫다. 지웠다 다시 쓰는 것도 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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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속심법이니 계개수행이니 하는따위의 이름을 짓는 까닭은 내 지향이 있기 때문이다. 곤수곡인 스승의 흔적을 보면서 스승의 지향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많은 흔적들 가운데 내가 천착하는 단어(의 의미)가 몇 있다. 同爐共冶. 佛學과 學佛. 般若五悳. 反白. 反白八道. 精神維新과 心理建設. 火候와 懺悔. 悳과 德 그리고 道德. 곤수곡인 스승은 ‘道’를 ‘悳’과 같은 뜻으로 쓴다. ‘곧 선 마음[直心]’인 ‘悳’. 이 '곧 선 마음’을 두루고루 펼쳐 움직이는 것이 德이다. 이 곧 선 마음은 심방변[ ‘忄’]과 같은 뜻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다보니 ‘忄’을 부수로 쓰는 한자에 특히 더 관심을 두고 살피곤 한다. 곤수곡인 스승의 가르침을 내 나름과 깜냥으로 해석한 바로, 누운 마음[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회복인데, 이 회복은 본디로 돌아감이다. 곤수곡인 스승의 흔적에서 이 본디로 돌아감은 反白이다. 그래서 곤수곡인 스승은 이 돌아감[歸]을 反白의 皈로 쓰는 것이다. 내 지향과 바탕은 이와 같음으로 비롯한다. 생각의 두께를 생각한다. 생각에 두께가 있을까? 생각의 두께는 흔적의 두께이기도 하겠다. 바탕에서 비롯한 지향은 나선으로 쌓이면서 바탕으로 돌아간다. 원심력의 지향은 구심력의 바탕으로 수렴되고 다시 펼쳐지는 나선의 지향은 두께없이 투명한 양면 같은 생각으로 켜켜이 쌓이면서 흔적이 중첩된 ‘나’로 나타난다. 나는 나를 이렇게 여긴다.

다시, ‘불이선회’의 결사를 떠올린다. 아제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