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인무영 2022. 1. 31. 08:59

옛일

두 달이 지난 것 같다. 그 사이 통화는 서너 번 했을까? 이틀 전에 전화를 드려서 간다고 말씀을 드렸고 자응서 나서면서 전화를 드렸다. 12시 반쯤 됐을 것이다. 한 시간 남짓 걸릴 거라고. 싸목싸목 천천히 가겠다고 하고, 가서 점심 공양 할 거라고 말씀드렸다.

명절 연휴는 달력에서만 있는 빨간색일 뿐, 길은 평소처럼 한가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제한 속도를 넘지 않으면서 안거를 정속으로 다뤘다. 콩앱을 열고 안거에 연결했다. 생클을 듣는데 익숙한 곡들이 흘렀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가 교도소장 방에서 모차르트의 음반 피가로의 결혼을 발견하고 꺼내서 레코드판 먼저를 털어내 턴테이블에 올리고는 잠깐 음악을 듣다가 이내 문을 잠근 다음에 마이크를 켜서 스피커에서 나오는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 – 편지의 2중창’을 확성기를 통해 쇼생크 마당에 퍼지게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드러누운 것처럼 편하게 의자에 안거 팔베개를 한 채 음악을 듣는 앤디는 교도소장이 문을 깨고 들어와 끌어낼 때까지 쇼생크의 모두가 자유를 느낄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안거 스피커 볼륨을 끝까지 높이고 안거 창문을 내렸다.

졸음에 겨워 함평휴게소에 안거를 멈추고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평소 1시간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쉬엄쉬엄 2시간 걸려 황모님을 뵀다.
남은 이가 몇 개 안 돼서 사과를 조각조각 콩만하게 잘라서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우물우물 하고 계셨는데 그나마 넘기지를 못하고 뱉어 내신다.

여느 때 같았으면 넓은 냄비에 찌개를 새로 끓여놓고 밥도 새로 지어놓고 계셨을 텐데... 뭐가 없다고 라면 끓여서 밥 말아 먹을 거냐고 하신다. 몸을 무겁게 일으키시면 부엌으로 가시는 황모님 뒤를 따랐다.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가 있어서 뚜껑을 열어보니 한 대접 정도 남은 미역국 끓여 놓은 게 있었다. 뜨거운 물 한 대접 더 붓고 라면(오신 채 안 들어간 ‘채식청정면’) 한 개 끓였다. 늘 해주시던 황모님이 고창에서 부엌(불)을 허락해주신 건 처음이다. 식은밥이라도 먹을 거냐고 하셔서 밥솥을 열어봤다. 아침에 한 것처럼 보이는 보온밥솥의 밥에서 미지근한 김이 희미하게 올라왔다. 조금 덜어진 걸 보니 한 주걱정도 드셨나보다. 몇 번의 전화 통화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하신다. 처음 듣는 것처럼 황모님 말씀을 봄동 겉절이 반찬인양 삼아 미역국라면 한 대접에 밥 두 주걱 말아서 점심공양을 했다.

공양을 하고 나니 속바지 안주머니에서 쌈지를 꺼내시더니 두 번 접힌 지폐 뭉치를 꺼내신다. 오만 원짜리 한 장, 만 원짜리 한 장, 천 원짜리 몇 장이 삼등분으로 접힌 지폐뭉치다. 천 원짜리만 남기고 지폐 두 장 펴서 주신다. 천 원짜리 지폐를 천천히 세시더니 칠천 원이나 남았다고 웃으시면서 다시 그대로 두 번 접어서 쌈지에 넣고 속바지 안주머니에 넣으신다.

기묘(己卯)생, 올해로 여든넷을 사시는 황모님. 겨워 보이신다. 옛일은 가고 새일이 오는 것이 한 생이라지만, 점점 고요해지는 한 생을 보는 내 연민이 가엽다.

배웅하시겠다고 느릿느릿 나오시는 황모님을 기다리는데 문 옆 더미 위에 둔 호미며 장갑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텃밭 둘레가 참 가지런하다. 햇살이 좋아서 사진을 찍었다. 이 순간.

태어난 불갑 선들을 지나가고 싶었다. 가는 길에 영광 외갓집을 들렸다. 대목수를 하셨던 외할아지가 직접 지으신 집이란다. 아직도 여전한 외갓집 대문과 뒤안 우물을 보니 50년 전 예닐곱 살 때 기억이 떠오른다. 두 살 터울 형과 황모님 혼례 치르는 날 태어났다는 네 살 많은 막내 외삼촌과 지냈던 외갓집이다. 공작새도 키웠던 정원이 참 예쁜 외갓집이었다. 10남매 맏이인 황모임은 아홉 동생들 중 셋은 먼저 보내고 여섯이 남았다.

국민학교 다닐 때 방학이면 큰집에서 며칠 외갓집에서 며칠을 지냈다. 황모님이 여름엔 모기가 많다고 안 보내셨고 주로 겨울에만 보내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여름에 갔던 기억도 제법 있다. 내가 태어난 자리는 선들 뒤 ‘후동’이라는데 ‘불갑면 녹산리 456번지’가 내 본적지다. 지금은 사촌 누이가 하는 ‘덕산가든’ 간판이 걸린 선들 큰집은 불갑저수지 아랫마을이다. ‘선돌이 있는 들’이라고 해서 선들이라고 하는 것 같다.

냇가에서 놀면서 잡은 송사리 몇마리를 고무신 벗어 그 안에 담아서 큰엄마한테 갖다드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는 깊지 않았다. 키가 작은 어린 내 무릎이 잠길 정도였다. 겨울엔 내가 얼었는데, 얼음에 구멍을 숭숭 뚫고 얼음판을 발로 쿵쿵 밟으면 그 구멍으로 송사리가 뿅 올라왔다. 뚝방에 불을 놓고 그 불에 송사리를 던져서 굽기도 했다. 열 살 무렵 그렇게 놀았다. 겨울밤이면 외양간 옆 사랑방에 그야말로 옹기종기 모여서 고구마를 깎아 먹었고, 당숙모가 하는 전방에서 사탕이며 과자를 사다 먹으면서 민화투 놀이도 했다. 마주앉아 이불 속에 발을 넣고 다리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다 하나씩 빼는 놀이도 했다. 볏짚 잘라서 김 푹푹 나도록 소죽도 쒀 봤고 밤새 먹은 고구마껍질하고 쌀겨를 물에 섞어서 돼지여물도 줘봤다. 큰집에 대한 기억 중에 선명한 것들이다. 그때 ‘오째’라고 불렀던 또래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문득, 어쩌다 이렇게 반세기 전 옛일을 기억하고 겨우겨우 더듬더듬 떠올리고 있는 내가 잠깐 슬펐다. 섣달 그믐이라 그렇다.